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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o Jul 17. 2024

쉼표³

나의 가슴속에 남은 것







 시마무이 해안으로 간다. 좁은 버스지만 창은 통창으로 깨끗하게 닦여있어 눈 안에 담기는 풍경이 그대로 한 장, 한 장. 액자가 된다. 연일 내리는 비로 샤코탄 블루를 볼 수 있을지 걱정이지만 은은하게 올라온 해무에 덮여있는 바다도 운치 있다. 짭조름한 바다의 습기도 맛있게 삼켜버리는 삼나무와 자작나무의 곧은 수피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 저기 산능선 어디쯤 원령공주가 옷코토누시에게 불화살을 겨누고 있을 것만 같다. 밀려오는 신문물에 영토를 빼앗기고 점점 더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을 원주민들의 발자국이 이제는 물결에 지워져 버린 땅에 왔다.  










 안개가 자욱하다. 예측할 수 없는 날씨라 하지만 이렇게 짙은 안개는 근래 처음이라는 기사님 말씀을 엿듣는다. 날씨마녀 인증딱지 이마에 다시 한번 붙이고, 조그만 통로를 향해 걸어간다. 사람들 목소리가 우렁우렁 울려대는 통로를 지나야 바다를 볼 수 있다고 한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 30m 정도의 깊은 굴 안을 울리는 바람 소리를 상상해 본다. 바람이 만들어 낼 웅장한 교향곡 앞에 인간인 우리는 얼마나 작고 나약해질까?



 언제나 눈길을 먼저 사로잡는 건 작은 풀들이다. 타는 듯한 햇빛과 거친 바람 앞에서도 꿋꿋하게 생명을 키워내는 풀들이 소복하게 자리한 곳. 그리고 끝이 없이 이어지는 바다. 숨이 트인다. 내가 사는 서해바다에서는 만날 수 없는 광활한 수평선을 오래 눈에 담는다.



 머리 위의 북극성을 바라보며 바람의 길을 따라 물결을 헤치며 나아가는 어부가 마주했을 무한의 바다. 생명을 주기도, 빼앗아가기도 하는 무정한 공간에서 비로소 터지는 숨이란.










 이곳은 동쪽 끝 바다를 만나기 위한 전초기지였다. 무이곶에 가는 동안 점점 더 짙어지는 해무에 슬며시 불안해진다. 정말 보고 싶은 곳이 카무이곶의 바다인데, 하늘이 쉽게 길을 내어줄 것 같지 않다. 바람이 심한 날은 출입구의 문을 닫아 걸기에 가서 꼭 확인을 해야만 한다. 우리나라 백일홍 전설에 등장하는 어린 연인들의 슬픈 전설이 구전되는 카무이곶.






 바다괴물의 횡포로 마을 사람들이 죽어가자 괴물을 물리친 이에게 자신의 딸과의 혼인을 허락하겠다는 족장의 말에 용기 있게 나선 청년과 그의 패기 어린 모습에 반해버린 족장의 딸. 바다괴물과의 사투로 배에 걸린 깃발은 피투성이가 되고 전투의 여파로 혼절한 청년을 싣고 해류를 따라 돌아오던 배를 바닷가 절벽 위에서 발견해 버린 족장의 딸은 그대로 투신해 버린다는 전설.



 자, 생각해 보자. 자신과의 혼약을 위해 목숨을 걸고 나간 이가 혹여나 잘못되어 돌아왔다 해도 그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는 치르는 예를 다하는 것이 먼저 아닌가? 성급한 판단으로 생을 마감한 족장의 딸의 선택에 나는 공감을 할 수가 없다. 결혼도 하지 않고 생을 마감했기에 젊은 여인들이 카무이곶에 들어오는 걸 질투해 심술을 부려 날씨가 변덕이 심하다는 말에 코웃음을 쳤다. 다행히 안개가 심하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이 정도는 출입이 가능하단 말에 카무이곶의 정상을 향해 이어진 좁은 둘레길을 걷는다.



 해안을 향해 엎드린 능선이 마치 일본전설 속 오니의 옆모습과 같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불퉁대는 말,

"오니, 안녕?"  



자세히 보면 정말 오니의 옆모습이!



 순간 한 손에 들고 있던 우산이 뒤집힐 정도로 강한 바람이 나를 강타한다. 뒤로 꺾여버린 우산을 황망하게 바라보다 또 한 번

"성질 한번 참 징허네."라고 하자 이번에 비바람으로 물미역 따귀를 맞는다. 축 늘어진 머리칼이 눈앞을 가리고 눈에 들어간 머리카락이 따가워 주저앉는다.

'으윽... 오냐, 이 오니! 옥이의 오기가 이기나 오니의 심술이 이기나 해보자. 어디!'








 기어이 동쪽, 땅끝을 알리는 표지판을 보겠다 기어이 걷는다. 물웅덩이로 변해버린 길 위를 걷다 울타리 나무 위로 기어올라 유격 훈련을 하듯 웅덩이를 피해 가고, 풀숲을 헤치며 카무이곶 거미부터 시작해 곤충들을 깨우며 동쪽 끝 이정표에 닿았다. 거칠 것 없는 바다에 외로이 선 바위가 표석이 된다. 여기, 파도를 밀어 보내는 바다조차 잠시 쉬어가는 곳이라 한다. 둥둥 둥둥, 먼 데서 울리는 북소리처럼 아득한 파도소리가 귀를 가득 채우고, 갈매기 소리조차 삼켜버린 바람이 나를 빚는 손길이 된다.







 이곳에 오기까지 마음속에 있던 모든 생각들이 단순해진다. 간절한 마음으로 고치고 다듬어 투고한 공모전 일도, 기말고사를 치른 아이들의 시험 성적도, 부모님의 건강도... 오래 숙원 했던 것들부터 이제는 어쩌면 무덤덤해져 가는 일들이 똑같이 다 파도에 흩어져 버린다. 나를 직시하고 있는 것만 같은 바위 끝 갈매기 한 마리가 꼭 내게 말을 건네는 기분이다.



 미국 작가 조이스 캐럴 오츠가 한 말이 떠오른다. 꾸준하고 덤덤하게 글을 쓰게 만들어 준 글귀.  




 나이 든 작가는 젊은 작가에게 어떤 충고를 해야 할까? 그는 자기가 몇 년 전 들었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할 만한 것들만 이야기해 줄 수 있을 뿐이다.

 기죽지 마라! 곁눈질하거나 당신을 다른 동료들과 비교하지 마라! 글쓰기는 경주가 아니다. 아무도 진짜로 이기지 못한다. 만족은 노력에서 나오고, 그 결과 보상이 따른다 해도 그런 보상은 아주 드물게 오는 법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당신 가슴속에 있는 것을 써라.

        - 조이스 캐럴 오츠, <작가의 신념> 중에서











 

 돌아 나오는 길, 비바람이 쉬지 않고 몰아치는 곳에서 자신의 집을 보수 중인 아주 작은 거미를 보았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어떤 것에도 개의치 않고 있는 자리에서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작은 생명이 얼마나 경이롭던지. 한참을 그 앞에 쪼그려 앉아 물방울 맺힌 거미줄을 바라보았다. 하나하나 은령銀鈴이 되어 울리는 고요한 소리로 비워 낸 숨을 채운다.




문득 궁금한 안부를 묻는다.


당신은, 이제 평안한가요?






















* 같이 듣고 싶은 곡


원령공주 o.s.t 아시타카의 전설


https://youtu.be/8NqnUtWnvSQ?si=YfPxq8eUL_Yxpj9s






#삿뽀로

#시마무이해안

#카무이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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