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같은 반에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남자아이가 있었어요. 덩치가 그 또래 아이들보다 1.5배는 더 컸어요. 둥글고 넓적했던 그 아이의 이마와 얼굴선, 유독 작았던 눈과 조그맣던 코가 흐릿한 형태로 제 기억 속에 남아있죠. 민이는 제가 좋다며 학교에 올 때 싸왔던 간식을 나눠주었어요. 아침이면 얼마나 오래 손에 쥐고 있었는지 형체가 흐물거리는 초콜릿이나 귤, 찐빵 등등 종류가 다양했죠. 그런데 정말 먹기 싫었어요. 민이가 다른 애들은 주지 않는데 저한테만 간식들을 주는 걸 보며 친구들의 놀려대는 게 싫었거든요. 그리고 아침마다 교문 앞에서 저를 기다렸다가 민이를 제게 떠미는 초췌한 얼굴의 그 녀석 엄마도 부담스러웠어요.
"우리 민이가 친구가 생겨서 아줌마가 너무 기뻐서 그래. 이거 나눠먹어."
라며 들려주는 봉지 안에는 어떤 때는 학용품이, 학교 앞 문방구에서 서둘러 한 움큼 집어온 것 같은 불량식품들이 들어있었죠. 제 옆에서 신이 나 걷는 녀석과 달리 전 제 손에 들린 봉지에서 나는 바스락대는 소리들이 마치 교실에서 저를 보며 비웃는 친구들 웃음소리 같아 정말 싫었어요.
그런 제 맘은 모르고, 기분이 좋다며 손을 덥석 잡아 옆구리에 붙이는 녀석에게 질겁해서 봉지를 휘둘러 뒤통수를 가격해 버릴 때가 종종 있었죠. 아주머니께서 선견지명이 있으셨던 거죠. 막대자석이나 왕 돋보기 이런 걸 넣어두셨으면 어쩔 뻔했게요. 몇 번 제게 뒤통수를 내어준 뒤로는 또 맞을까 봐 바짝 다가오지는 못하고 30cm 정도 떨어져 걷던 민이. 매일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콧노래를 불렀어요. 음정이 맞지 않는 멜로디에 가사를 짐작할 수 없는 발음으로 저는 가끔 민이의 입 속을 보고 싶었어요. 혀가 어떻게 생겼길래 음절이 이렇게 발음이 되는지 궁금했거든요.
그런데 만약에 제가 혀 속을 보여달라 말하면 정말 그 아이의 모든 걸 알아버리게 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어요. 지금 생각해도 이상했을 질문이잖아요. 누가 갑자기 "네 입 속 좀 보자."라고 이비인후과 의사 선생님 말고 이리 이야기 한다면 대뜸 '정신 나갔니?'라는 눈총부터 받을지도 모르죠. 민이라면 뭐, 입 큰 고래가 되어 다 보여주었을 테지만요.
매일 제 옆에 있는 거 아니면 혼자 나무아래서 무언가 파고, 찾고 하는 민이를 틈만 나면 놀리는 같은 반 개구쟁이들이 있었어요. 왜 그렇게 괴롭히는지 이유가 궁금해서 물었더랬죠. '생긴 게 기분 나빠서' 또는 '멍청하게 말하는 게 싫어서' 등의 이유를 말하더군요. 황당한 그 말에 그 녀석들과 맞서 치고받고 싸우다 얼굴에 크게 상처가 난 적도 있어요. 병법에서 제일 치사한 게 인해전술이라 생각해요. 1:3 혹은 1:4는 이길 확률이 어마어마하게 낮아지죠. 한 번은 싸움에서 진 게 분해서 괜히 "너 때문이야."라고 민이에게 화풀이를 했어요. 제가 싸우고 있으면 민이는 나무 뒤로 숨어서 발을 동동거리고 있거든요. 선생님이라도 불러주지 눈치 없는 녀석은 그렇게 동동대다 발 밑에 지도를 그릴 때도 있었어요. 다음날, 민이 어머님께서 반창고와 연고를 한가득 갖고 오셨죠. 민이에게 들었다면서 말이죠.
그때의 저는 민이 가족에게 어떤 존재였을까요?문득, 궁금해집니다.야외에서의 아침 조회가 있을 때면 민이와 제가 교실에 남겨질 때가 많았어요.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지 않았을까 싶어요. 저는 대체 왜 남았는지 기억이 안나거든요. 제가 햇볕 아래 있다가 갑자기 핑그르르 쓰러질 그런 사람도 아니고, 어디가 크게 아팠던 것도 아닌데 제가 민이와 남아 교실을 지킬 때가 많았던 게 생각이 나요.
하루는 교실에서 제가 '이라이자'라고 부르던 여자아이 책상 위 필통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그 아이가 늘 자랑하는 미국에서 삼촌이 보내 준 기차 모양의 기계식 연필깎이로 뾰족한 중세성들처럼 다듬어진 연필을 보고 저도 모르게 "나도 이런 거 갖고 싶다."라고 말을 했더랬죠. 단순히 연필을 갖고 싶단 뜻이 아니었어요. 엄마의 세심한 배려와 보살핌을 받아 아침이면 세상 어떤 공주보다 더 반짝이는 모습으로 학교에 오는 그 아이가 부러웠었거든요. 예쁜 치마를 입고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먼지 한 톨 없이 반짝거리며 교문에 들어서는 이라이자를 보면 제가 한없이 꼬질꼬질해 보였어요. 저는 그때, 그 아이의 반짝거리는 삶 자체가 부러웠던 거죠.
아침 조회가 끝나고 아이들이 교실로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라이자가 울기 시작해요. 필통에 연필들이 없어졌다고 말이죠. 담임선생님께서는 반아이들 전체 소지품 검사를 시작했죠. 이쯤 되면 불길한 BGM이 한 곡, 나와줘야죠. 유주얼 서스펙트 버금가는 긴장감의 곡으로 말이죠. 그 연필이 어디 있었게요? 이런 싱거운 반전 따위 적고 싶지 않지만. 아직도 억울해요. 세상 어떤 도둑이 금방 들킬 장물을 가까이 둔단 말입니까? 이라이자 필통 속에 있던 것들이 제 필통 속에 옮겨져 존재감을 뾰족뾰족 위풍당당하게 빛내고 있지 말입니까?
덕분에 저는 도둑으로 몰려 책상에 엎드려 펑펑 울었더랬죠. 제가 한 게 아니라 민이가 한 거라고 이야기를 해도 믿어줄 사람이 없단 생각이 억울해서 더 서럽게 울었죠. 나중에 담임선생님께 말씀을 드려봤지만, 믿어주지 않는 눈빛으로 고개만 끄덕이시더라고요. 그 일로 민이와 1주일 이상 말도 안 하고 지냈어요. 수업하다가도, 운동장에서 다른 여자아이들과 고무줄을 하다가도, 남자아이들과 오징어나 다방구를 하다가도 느낌이 이상해 뒤돌아보면 왼쪽으로 고개를 기울이고 입을 반쯤 벌리고 제 쪽을 보고 있는 민이가 보이더라고요. 세상 슬픈 표정을 바라보다 결국 마음 풀고 다시 같이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 얼굴을 보고 어떻게 오래 화를 낼 수 있어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도 종식시킬 수 있을 거예요.
엄마 손을 떠나 저와 같이 교문을 들어설 때면 뒤에서 아무리 손을 흔들어도 앞만 보고 가느라 답을 할 줄 몰랐던 덩치는 인왕산 호랑이 버금가는 민이 녀석이 5학년 말, 갑자기 전학을 가게 돼요. 들리는 풍문에 따르면 민이 아버님 사업이 잘못돼서 전라도에 사는 친척이 하는 일을 도우러 가게 되었다더군요. 갑작스러운 민이의 전학으로 시골학교 교무실이 소란스럽던 날, 민이는 저를 붙들고 내내 울어댔죠.
"어, 언제 봐. 나는 너랑 결혼할 건데. 그럼 언제 마, 만나러 와. 나... 나는 언제 와?"
이 말을 듣자마자 뒤통수를 또 세게 가격을 했죠. (지금 진심으로 속죄합니다. 힘없고 나약한 영혼에게 가했던 옹골찬 스매싱. 정말 두 손 모아 속죄의 기도를 올립니다. 저, 어렸어요. 갑자기 혼자 결혼을 하네, 마네, 이러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맞고도 뒤통수를 문지르기는커녕 더 서럽게 울던 녀석이 저를 번쩍 들어 올려요. 두 팔이 묶이듯 녀석의 두꺼운 팔에 감싸여 그렇게 들어 올려지니 아무것도 못하고 다리만 버둥대는데, 저를 들고 냅다 뛰기 시작하더라고요. 학교 뒤 재래식 화장실 옆 정구장으로 달려간 녀석은 정구장 장비를 모아둔 창고 앞까지 달려가더니 그제사 저를 내려놓았죠.
"여, 여기 숨으면 못 찾아? 모. 못 찾겠지? 지... 집에 안 가. 아빠 나 미워하는데, 왜, 왜 가자고 해. 안가."
배가 순이 할머니 무덤보다 더 봉긋하게 나온 녀석이 저를 들고뛰느라 숨이 턱에 차서 침까지 흘리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다 처음으로 민이의 눈을 보게 되었죠. 짝눈이었어요. 한쪽은 쌍꺼풀이 있고, 한쪽은 없는. 한쪽은 동그란데, 다른 한쪽은 살짝 찌그러져있어요. 비대칭의 눈, 그 안의 눈동자가 계속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어요. 쉼 없이 움직이는 메트로늄처럼 정신없는 눈동자가 걱정돼서 두 손으로 그 녀석 볼을 잡았죠.
"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결혼은 무슨. 우리 엄마한테 허락은 받았냐? 어?"
그제사 녀석은 얼마 전 운동회 때 마을 계주에서 다른 마을을 순식간에 평정해 버린 고여사의 입담(달리기 실력이 아닌, 입담!)을 떠올리고 민이는 사색이 되었죠. 고여사의 말들을 이해하기에는 언어구사력이 한없이 짧았던 민이지만 그녀의 기백만큼은 또렷이 목도했기에 넘사벽의 고여사를 잠시 쉽게 봤구나 하는 반성의 기색이 눈동자에 찾아들며 천천히 진정이 되었어요.
가쁘던 민이의 숨이 고요해질 때, 처음으로 민이의 손을 잡았죠. 정말 축축해요. 한여름의 논에서 놀던 왕개구리를 잡아 올릴 때처럼 두 손안에 가득 들어차는 손을 붙들고 진심 다해 이야기를 했어요.
"가서 불량식품 그만 먹고, 엄마한테 성질부리지 말고, 누가 너 때리면 이빨 확 드러내고 막 소리 질러. 맞고 있지 말고. 어? 나랑 결혼하고 싶으면 한글 다 떼고 와라. 살도 빼고."
제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다, 눈물을 어깨 끝에 문지르다, 급기야 콧물은 제 손까지 끌어다 손등으로 닦아대던 녀석을 진정시켜 교실로 데리고 오니 우리를 찾느라 혼비백산했던 선생님과 민이 어머님이 달려와 안아주었죠.
달큼한 숨냄새가 기억이 나요. 늘 민이에게 미안한 표정이었던 민이 엄마의 숨에서 나던 아카시아향보다 짙고, 바다내음보다 연한 비릿한 숨 내음.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그 숨결의 냄새를 뜻밖에도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만났어라. "영옥과 정준의 에피소드"에서요. 노희경 작가의 옴니버스 형식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한지민 씨와 김우빈 씨가 열연하는 파트에는 주인공 영옥(한지민)의 언니 영희를 통해서요.
"영희가 특별한 건 맞다. 영희는 특별히 이상하고, 특별히 못났고, 특별히 나를 힘들게 만드니까."
라며 자신의 쌍둥이 언니를 소개하는 영옥의 인상적인 독백이 저를 사로잡았죠.
* 같이 듣고 싶은 곡
임윤찬 : Chopin E'tudes - No.5 in E minor Wrong No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