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no Aug 23. 2024

밀당의 고수, 대담한 전략가








 불을 끈 직후는 어느 때보다 어둡죠. 빛 아래 웅크리고 있던 몸을 활짝 펴 모든 사물을 재빠르게 덮어버리는 어둠의 민첩한 행동은 순식간에 제 눈앞의 색들을 먹어 치웁니다. 동공이 같은 결의 옷을 입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요. 공기의 밀도는 높아지고 소리는 섬세해지죠. 풀숲에서 훌쩍 뛰어나와 재빠르게 집을 찾아 돌아가는 어린 개구리의 발자국 소리들까지 들리는 것 같아요. 정말이에요, 꼭 귀 기울여 보세요. 창문을 활짝 열어둔 채로 눈을 감고요.  

 
 갑작스러운 제 움직임에 밀려 툭, 하고 떨어진 책이 펼쳐졌죠. 그 사이로 흰 봉투 하나가 튀어나옵니다. 모퉁이가 접힌 봉투. 이게 무얼까 싶어 손을 뻗으니 방바닥만 손가락으로 긁고 올뿐이었죠. 빛나는 흰 봉투는 창문 사이를 밀고 들어온 달그림자였어요. 차오른 달이 뿜어내는 누군가의 한숨처럼 끝자락이 투명한 달빛이 흐붓하게 흘러들어와 제게 편지를 내민 거예요. 바닥을 긁던 손가락을 펼쳐 달의 편지를 펼쳐 듭니다. 아직 지나지 않고 머무는 여름의 달빛이 보내온 편지가 무겁게 가라앉던 저를 일으켜 세웁니다.





아무리 찾아도 없는 보름달 사진 대신에 노을로요.









 창문을 열었어요. 습도 높은 공기가 밀려들어와 저를 감싸죠. 그리고 가릴 것 없이 뻗어있는 산능선 위에도, 태풍이 몰아 보낸 두텁던 구름이 사라진 길들이 마주치는 아주 작은 소실점이 된 고갯마루 입구에도 온통 달빛이 전부예요. 모든 장소에 공평하게 내려앉는 달빛이 눈부시게 출렁이고 있었어요. 지쳐있던 마음속까지 달빛이 차오릅니다. 해야 할 일들의 경중을 다투느라 켕겨진 일상들이 느슨해져요. 연주를 마치고 풀어 둔 첼로줄처럼요.  


달빛을 머금고 가장자리가 우련하게 옅어진 구름들이 너울거리며 눈앞에 떠가고 있어요. 어둠이 슬어 가라앉던 날들을 달빛이 새로 깁고 있네요.
이울어가는 계절과 시작하는 계절의 건널목에서 저는 달빛을 입고 이제야 조금 더 반듯하게 서 있게 되었어요.  














 어둠이 짙어져야 보이는 것들이 있어요. 밝음 속에 있으면 드러나지 않는 사물의 뒷모습.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골목을 오가는 바쁜 걸음들. 허물어져가는 담장에 기대어 작아져 가는 풀꽃들. 지난번 갔던 뱅크시의 전시 떠올려 봅니다.


 밝음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존재들을 그려내는 이름 없는 화가. 그래피티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미지의 화가 뱅크시에 대해 전 세계적으로 관심이 높습니다.  한 사람인지, 여럿이 활동하는지도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저 추측들이 난무하죠. 아라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전시회는 지하 3개 층 전체를 그에게 할애한 제법 큰 규모로 열리고 있죠. 초창기 작품들부터 그가 창조한 디즈멀랜드, 그리고 다른 작가들의 작품들까지 한번에 만나니 뱅크시 작품에 관심이 있다면 치면 서운할 전시입니다.











 1974년생. 백인. 영국 브리스톨시 출생.  대영박물관이나 루브르,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등에 잠입해서 소를 사냥하고 쇼핑하는 원시인을 그린 돌이나 미사일 딱정벌레등을 몰래 전시하고 나오는 기행을 저지르기도 하는 얼굴 없는 예술가. 그는 이러한 자신의 행동을 제대로 감상하지 않는 현대인의 예술에 대한 허례허식을 비판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 외에도 게릴라처럼 등장해 그리고 사라지는 그래피티 역시 그를 대표하는 장르가 되었는데 그가 유명세를 타면서 그의 그림이 있는 건물의 매매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자 뱅크시는 센트럴파크에서 자기 그림을 늘어놓고 60달러에 파는 실험을 합니다. 6시간 동안 고작 3명이 구입을 해 간 일을 공개하죠. 예술을 재테크의 방편으로 생각하는 현대인들의 물질 만능주의를 비판하는 실험이었어요.


 그의 그림을 보면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그림 속 최다빈도의 출연자 쥐(Rat)가 있죠. 쥐는 스펠링을 섞었을 때 ART가 되는 점. 그리고 어둠 속에서 재빠르게 등장했다 사라지는 행동의 민첩성. 누구나 혐오하지만 사라지지 않는 끈질긴 생명력등이 자신과 자신의 행동을 닮았기에 애정한다고 합니다. 다른 인간들에게 혐오스러운 존재가 그에게는 뮤즈라니 흥미롭죠? 그리고 그의 낙원 디즈멀랜드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판화 작품 등에서도 디즈니랜드 주인공들을 이용해 현실을 비판하는 장면들이 등장하죠. 꿈과 희망이 사라진 사람들의 놀이동산, 절망과 상실의 공간이 바로 디즈멀랜드입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그에 관한 일화는 2018년 10월 경매에서 '풍선을 든 소녀'가 104만 2천 파운드에 낙찰되는 순간, 경매의 낙찰을 알리는 망치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액자에 장치해 둔 분쇄기가 작동하며 그림이 분쇄되는 일입니다. 그림을 구입한 사람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대담함을 가진 뱅크시의 행동으로 인해 반쯤 잘려나간 그림임에도 그대로 구매하며 미술사에 길이 남을 순간이라고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와 관련한 일련의 사건들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예술품에 대한 소유욕구가 불러일으킨 천정부지로 치솟는 가격과 높은 가격일수록 더욱더 인정받는 기묘한 꼬리표가 붙는 현대예술에 대해 소비자 혹은 향유자인 우리가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현대 미술계의 이단아, 밀당의 고수이자 대담한 전략가. 리얼 뱅크시전에서 직접 만나보시길 바라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세상의 틈을 엿볼 수 있는 멋진 시간이 되실 거예요. 그리고 또 다른 젊은 예술가들의 작품도 만날 수 있으니 더욱 풍요로운 관람의 기회가 되실 거라 생각합니다.




여인은 모두 영웅이다. 캄보디아. 제이알(뱅크시 작품 아님)





 바람이 서서히 달라집니다. 무더위가 가시고, 이울어져 가는 계절을 배웅한 다음 눈부신 인디언 써머를 맞이하시길 바라요. 조금은 시원해진 마음으로요.







* 같이 듣고 싶은 곡

영화 버드맨 O.S.T 중 Flying Suite


https://youtu.be/TyAIhrbIh0Y?si=Y4-iyNBhpl-0shvg






#리얼뱅크시


작가의 이전글 안야, 그녀의 시선 속으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