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한 사원에 특별한 기둥이 3개가 있다고 합니다. 한쪽기둥에 있는 크기가 다른 원반 64개를 다른 기둥으로 모두 옮기면 세상에 종말이 온다고 하죠. 옮길 때는 큰 것이 작은 것 위에 올려지면 안 된다는 규칙 한 가지만 존재해요. 보조기둥 1개를 사용해서 이걸 옮기려면 몇 번을 움직여야 할까요? 다 옮겨지면 세상이 멸망한다는데, 그전에 막아는 봐야잖겠어요? 고등학교 수열 문제를 가르칠 때 꼭 예를 드는 지문 중 하나예요. 하나씩 다 옮겨볼 수는 없으니 원반이 움직이는 규칙을 찾아보자 이야기하죠.
1개 - 1번 2개 - 3번 3개 - 7번 ...
고로 "2의 n제곱 - 1"이란 경우의 수가 귀납적 결론으로 나오는데, 64개의 원반을 다 옮기려면 1844경 6744조 737억 955만 1615번의 움직임이 필요하죠. 1초에 하나씩 옮긴 다하면 무려 5849억 년이 걸린 답니다. (다행이쥬? 안 망해라, 세상! 아직 당당 멀었어라.)
이렇게 큰 수를 인도인들은 어떻게 가늠할 수 있었을까요? 더군다나 새로운 수의 체계들이 등장할 때마다 새로운 또 다른 숫자를 만들어내던 다른 문명과 달리 1부터 9까지 숫자들로 수학의 틀을 만들었던 그들, 중국이 발견한 음수의 개념을 넘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 텅 빈 것이 아닌 새로운 단계의 시작이라는 '0'의 개념을 만들어낸 그들이 늘 놀랍다는 생각을 하곤 해요.
인도의 차투르부즈 사원에 가면 크리슈나신을 모시는 사원 한쪽 비문에 사람들이 바친 건축 당시 현물의 개수 등이 나오는데, 그때 '0'이 엄청난 존재감을 뽐내며 등장하죠. 세상에 없던, 아무것도 아닌 요 동그라미 한 개가 수의 단위를 큰 폭으로 증가하게 만들어 주었죠. 그걸 더 깊이 연구한 브라만 굽타 덕분에 우리는 양수와 음수, 그리고 0을 통해 기본 개념을 넘어선 방정식까지 사고를 확장시켰고 이를 통해 수학은 또 다른 엄청난 발전을 이루죠.
수의 체계가 늘어난다는 건 머릿속 사고 영역의 폭발적 확장을 의미하죠. 수없이 많은 하늘의 별들을, 그들까지 가는 거리를, 우리 몸속의 세포 수와 그로 인해 완성되어 가는 성장의 일부까지...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건 일찍이 '0'이라는 숫자가 소멸이나 텅 빈 것이 끝이 아닌 비어있음. 가장 작은 존재이나 모든 것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이들을 통해서였죠.
수없이 많은 생의 윤회를 한다 믿었던 인도인들에게 이 생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삶의 일부, 그러기에 죽음은 소멸이 아닌 또 다른 여정의 시작이라 생각했다죠. 그래서 어쩌면 '0'이라는 개념이 그들에게 더 쉽게 녹아들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가장 작은 존재로 풍부해진 생각의 결이 놀랍지 않으신가요? 뜬금없이 수학이야기로 왜 명절 전에 신경 쓸 일도 많은데 이리 괴롭히시느냐 물으신다면, 제게는 '0'과 같이 기특한 존재 조카 은지 이야기 좀 하려고 서두가 길었다고 발뺌할래요. 쿨럭.
이번 추석은 은지 생일과 겹쳐 더 풍성해졌어요. 미리 생일 케이크와 갖가지 소품을 준비해 둔 앤 덕분에 근사한 생일상이 가게 한구석에 차려지고, 미역국부터 돼지갈비에 새우찜까지 준비한 큰 손 고여사님 덕분에 상다리는 휘어지고 사돈댁에서 준비해 주신 이쁜 원피스에 선글라스까지 착장 완료한 은지. 온 가족의 환호 속에 생일축하 노래를 들으며 어깨춤을 추는 저 녀석이 우리 가족들에게 또 다른 '0'번이 되었어요.
기분 좋아 보이는 은지에게 제가 -은지, 우리 은지 며짜아알이야아? 이렇게 물었죠.
그러자 선글라스를 눈 밑으로 내리고 저를 빤히, 그것도 한참을 응시하던 녀석이 하는 말. -똑바로 말해봐. 머라고 했어?
엄마, 저, 앤, 은지. 이렇게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봅니다. 마치 여인으로서 살아가는 과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 같아요. 각각의 생김새, 자라온 환경, 배움의 정도, 하는 일 등등 많은 것들이 다르지만 숫자로 놓는다면 5진법 정도로 표현될 거 같은 삶의 모양들은 비슷해요. 그런데 가운데 낀 은지라는 숫자 '0'이 만드는 삶의 순간들은 앞선 1과 2, 3과는 전혀 다른 숫자로 우리를 만들어주더라고요.
웃음이 더 많아진 엄마, 은지를 키우며 한국말이 더 늘어가는 앤, 앤과 은지를 지키기 위해 조금 더 노력하는 것 같지만 신통치 않아 늘 제게 니킥을 당하는 남동생. 삶이 연결되는 고리가 더 견고해지고 단단해져요. 서로의 유대와 이해의 깊이가 이렇게 날이 갈수록 더해가면 좋겠어요. 가끔 엄마 빈정 상하게 만드는 남동생의 눈치 없는 아빠 코스프레는 좀... 음... 답이 없지만요. 안다니 박사 포즈로 애를 몇이나 길러내신 엄마한테 뭐라 할라치면 제가 눈으로 레이저를 쏘는데, 저 녀석 나이 먹더니 배가 한참이나 나와서 다 튕겨내요. 저 눈치 없는 녀석이 철갑판다가 되었단 말이죠.
0이라는 숫자가 우리 영혼의 주머니처럼 보입니다. 하나의 온전한 단어처럼도 보이구요. 태양과 가까이, 흰 옷을 입고 살아간다는 부족민들이 들고 다니는 동그란 포포로같기도 합니다. 은지의 작고 앙증맞은 입술이 방긋 벌어져 전하는 말들이 세상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아름다운 멜로디의 노래가 되고, 그 노래는 타인으로 살아오던 우리들의 인연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줍니다.
찬란한 삶의 기쁨을 가장 순수한 방법으로 전할 수 있는 짧은 감탄사로 톡, 세상에 알처럼 태어나는 0. 점점 커져 마치 작은 보호막처럼 서로를 감싸주는 보드라운 언어의 우무질이 은지가 자랄수록 더욱 크게 우리 삶에 드리워지는 기분이 듭니다. 때로는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행동이나 말로 좁아드는 마음까지도 회복탄력성이 있어 펴줄 수 있는 영혼의 연결고리가 있어 다행입니다.
여러분 삶의 고리는 어떤 모습인가요? 제법 긴 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오가는 길 평안하시길, 안전하시길, 무엇보다 서로의 삶에 존재하는 영혼의 고리들이 미소 속에 더욱 견고해지는 시간 되시길 기원합니다. 행복하셔요. 기쁜 감탄사만 가득한 날들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