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한 경적소리와 함께 내 몸이 앞 좌석의 등받이에 누군가 던진 끈끈이 풀처럼 달라붙을 듯 가까워진다. 단단히 멘 안전띠 덕분에 본태를 벗어난 유체이탈은 면했지만, 갑작스러운 압박으로 내내 불편하던 배 속이 또다시 들끓기 시작한다. 간신히 눌러놓았던 마그마가 급정거라는 에네르기파의 등장으로 요동친다. 나도 모르게 잇새로 새어 나오는 말,
"운전 정말... 욧 같이 하시..."
잠이 덜 깼다. 혼곤한 정신 사이로 감춰놓았던 나의 본능이 그만 새어 나왔다. 입술 사이 흘러나오는 불온한 기운에 놀라 눈을 번쩍 떠서 바라보니 앞 버스와 내가 탄 버스의 간격이 채 30센티도 되지 않는다. 끼어들기로 차선변경을 하던 중 앞차의 급정거로 놀란 우리 차 기사님이 경적을 울리며 방어운전을 하신 것 같다. 애초에 좀 더 안전거리를 확보했다면 좋았을 텐데, 초보 운전자도 하지 않는 연이은 브레이크 제동에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한다.
초보. 나는 지금 나이 지긋한 기사님을 보고 그를 초보와 비교하고 있다. 운전규칙을 지상과제로 준수하며 도로 위를 달릴 초보 운전자와 연륜으로 체득한 자신만의 운전규칙을 토대로 운전하는 운전자 중 누가 진짜 운전자라 할 수 있을까?
터미널에 도착해 울렁이는 속을 달래기 위해 편의점에 들어갔다. 음료수 가판대에 놓인 다양한 종류들을 매의 눈으로 살펴본다. 그중에 눈에 들어온 바나나맛 우유와 바나나 우유. 단지형으로 가운데 배가 불룩한 노란 바나나 우유를 바라본다. 그 옆에는 날렵한 곡선으로 길쭉한 몸통을 가진 노란 캡이 앙증맞은 바나나맛 우유가 있다. 둘 다 진짜 바나나는 들어있지 않을 텐데 함량으로는 자신이 제일이라며 업계 최고를 외치고 있다.
바나나의 노란색에 물려버린 나는 결국 블랙보리를 손에 들고 행선지로 향했다. 종로의 낙원상가 앤피오피아 홀. 내가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단체의 연말 시상식이 열리는 날이다. 행사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터라 옛정취가 희미하게 묻어있는 서울의 오래된 골목길을 소심하게 서성여 본다. 길을 잃으면 안 되니 이정표로 점찍은 음식점 간판을 놓고 갈지자로 이리저리 오가며 벽돌담에 새겨진 세월의 흔적을 눈여겨본다.
서로 원조라며 커다랗게 새겨둔 간판을 보고 있으니 피식 웃음이 난다. 그렇게 따지면 원조 아닌 집이 어디 있겠는가. 같은 아귀찜이라도 내가 세운 음식점에서는 내 손 맛이 원조가 아닐까?
귀에서는 버스를 탈 때부터 재생되고 있는 성해나 작가의 <혼모노>가 이어지고 있다. 종이책으로 여러 번 읽었지만, 오디오북으로 계속 듣고 있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붙드는 걸까?
7편의 단편 소설이 한데 묶인 성해나 작가의 2번째 소설집 <혼모노>는 한 명의 작가가 비집고 벌려놓은 세상의 다양한 틈이 존재한다.
1편 길티 클럽 - 호랑이 만지기는 김곤이라는 천재 감독을 좋아하는 팬이 등장한다. 그녀의 시선을 통해 한 사람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일에 대해 곰곰하게 된다. 감정의 휘발성에 대해서도.
2편 스무드에서는 한국을 처음 방문한 재미교포 2세(주인공의 아버지는 입양아로 한국 출신임을 숨기고 살아감)가 태극기 집회에 우연히 참석하게 되며 겪는 일을 다루고 있다. (미스터 킴. 김흥국씨가 연상되는 그분!)
3편 혼모노와 4편 구의 집 - 갈원동 98번지가 나를 사로잡아 놓아주질 않는 소설의 참호이다.
5편 우호적 감정은 스타트업 기업에서 근무하는 진, 수잔, 알렉스를 통해 연령대와 성별의 차이 속에 겪게 되는 갈등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6편 잉태기는 상류층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손녀의 인생을 완벽하게 레디 메이드 하기 위해 벌이는 팽팽한 대립을 볼 수 있다.
7편 메탈에서는 쇠락해 가는 공간을 자신들의 아지트로 삼은 소년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중 문제의 <혼모노>는 경력 30년 차에 번아웃을 진단받은 박수무당 문수가 등장한다. 그는 자신이 모시는 장수할멈의 영험한 기운으로 많은 유명세를 얻은 무당이었다. 살아있는 것, 진짜인 물건(이 말이 일본어로 혼모노)들을 고집하는 할멈을 위해 꽃시장에 나가 탐스러운 목단꽃을 사 오고 정성스레 신당을 꾸미던 문수는 어느 날 자신이 벌이던 굿판에서 칼에 베여 피를 흘리는 모습이 유튜브에 생중계되며 순식간에 손님들을 잃어버린다. 문수의 앞 집에 갓 신내림을 받은 것 같은 신애기가 이사와 인사를 드리러 온 날. 어린 그녀가 살기 어린 눈매로 문수를 바라보며 하는 말이 압권이다.
"신발이 다 했다더니 진짠가 보네. 할멈이 나한테 온 줄도 모르고. 하기야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뭘 알겠냐마는. ㅋㅋ ㅋㅋㅋ."
이어지는 그녀의 경박한 웃음소리와 함께 자신이 모시던 신에게 버림받았다는 걸 통고받은 문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15년 인연을 이어 온 유명 국회의원 황보의 재선 성공을 위한 굿판을 맡기로 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장수할멈이 새로 간택한 신애기에게 빼앗긴다.
굿판이 벌어지던 날, 문수는 정성껏 고른 제기들과 함께 황보의 집을 방문한다. 마치 원래 자신을 위한 판이었던 것처럼 그는 악사들의 음악에 맞추어 무령을 흔든다. 발끝을 파고드는 섬뜩한 칼날의 감촉을 참아내며 작두를 타는 문수와 신애기 위로 구름은 흘러가며 그늘을 만든다. 마침내 문수를 질린 눈으로 바라보며 자리에 쓰러진 신애기. 무당이 된 후 처음으로 누군가의 부탁으로 선 굿판이 아닌, 자신이 살아온 삶을 증명하는 굿판에서 문수는 진짜가 된다.
구의 집 - 갈원동 98번지는 김수근 건축가의 작품이었던 남영동 대공분실이 생겨나던 과정을 픽션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새로운 정권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다가 추방당한 선배를 대신해 새 정권의 총아가 된 여제화. 밀려드는 일을 감당하기 힘들 지경이 되자, 구보승이라는 학생을 보조로 선발한다.
지관인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풍수를 보고 자란 구보승은 야망도 없고 특별한 경력도 없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여제화의 건축설계를 도우면서 그는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피력하기 시작한다. 인간을 위한 건축, 그 공간에서 살아갈 인간에 대해 생각하라고 강조하는 여제화. 그의 가르침을 너무도 성실하게 이행하던 구보승은 그들이 설계하는 건물의 용도에 대해 알게 된다.
고문받고, 자백을 하게 될 이들이 갇혀있게 되는 건물을 자신들이 짓고 있는 것이었다. 구보승은 갇힌 이들의 심리상태에 대해서까지 예리하게 파악하며 낮에 한 번만 햇살이 들어오게 창문의 사이즈를 줄인다. 나선형의 계단을 만들어 눈을 가린 채 통로를 오가는 이들에게 방향감을 알 수 없게 만든다. 복도의 천장을 높게 만들어 고통받는 이들의 신음소리가 사방으로 퍼지게 만든다. 밖에서 방문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외부감시창을 만든다.
그곳에서 실낱같은 희망과 압도적인 절망을 경험할 누군가를 완벽하게 공간의 구조로 압도하기 위한 다양한 방편을 설계도에 첨가한다. 그렇게 지어진 건물에는 <구의 집>이라는 별칭이 붙는다. 한자어로 구는 어떤 글자였을까? 그리고 사라진 구보승은 어디에 있을까?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각 편에서 진짜와 가짜의 모호한 경계를 보여준다. 우리는 정확한 구분을 할 수 없는 존재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스스로 존재의 가치 증명을 해내는 다양한 방법들을 만나게 된다. 읽을수록 감탄이 이는 소설이다. 젊은 작가가 끌고 가는 서사의 힘에 놀라고, 등장인물의 정교한 캐릭터와 각자가 갖고 있는 삶의 분명한 형태에 감탄한다. 그들은 책 속에서만 살아있는 니세모노가 아니라 우리가 오늘을 살아가며 만나게 되는 다양한 혼모노들이다.
오디오북의 4번째 챕터가 끝나고, 나는 행사장으로 향했다. 독특한 구조의 낙원상가의 입구에서 벌써 헤매고 같은 장소를 3번을 돌다가 계단을 이용해 무조건 꼭대기층을 향해 올라갔다. 5층이니 어떻게든 5층에 닿으면 길이 보이겠지란 심정으로 뚜벅뚜벅 계단을 올랐다. 상을 받는 이들에게 전해 줄 상패와 꽃다발을 나르는 임무를 맡은지라 특별히 차려입은 옷이 영 어색하다. 실제로는 내가 간절히 받고 싶은 상인데, 그걸 수여하는 걸 도우러 간다. (아, 정말이지... 누군가 차려 준 밥상이라도 받고싶다.)
오늘 수상식장의 혼모노(진짜)인 수상자들,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니세모노(가짜)인 나. 간절함의 차이를 측정하면 얼마쯤 되려나? 계단을 오르는 내 머릿속에 문수의 굿판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새하얀 옷깃이 붉게 물들고 서있는 자리는 붉은 웅덩이가 되어 스스로를 비우고 있던 문수. 한없이 가볍던 그의 발끝. 어떤 것에도 매어있지 않는 그의 기도는 자유롭고 정결해 눈부시던 순간. 신에게 버림받았으면 어떤가. 자신이 살아온 시간의 힘으로 진짜를 압도한 문수를 떠올리자 발길이 가벼워진다. 언제고 한번 신명나는 나만의 판을 벌일 날을 그리며 발 끝에 힘을 준다.
* 같이 듣고 싶은 곡
영화 국보의 o.s.t
https://youtu.be/gkLAv2PO4Xc?si=bmfP46PW1YyoLHUa
#혼모노
#성해나는천재다
#영화국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