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묻은 발자국

by Bono





기억나? 김유신의 동생, 언니가 꾼 꿈을 비단치마와 바꾼 여인 있잖아. 문희였던가. 왜 갑자기 그 이야기를 꺼내냐고? 채근 좀 하지 마. 사람이 말을 하려면 뜸도 좀 들이면서 나한테 집중할 시간을 만들어야 할 거 아냐? 눈은 엄한데 가 있고, 귀는 대충 열려있으면서 말하라고 재촉하기는. 아... 알았어! 노... 노려보고 그래.


이건 실화야. 보희가 꾼 꿈이 홍수가 되어 서라벌을 덮은 건 아무도 증명 못 할 이야기지. 그녀의 꿈을 산 문희의 엄청난 신분상승이 없었다면 아무도 몰랐을걸? 지금 내가 본 건 말이지. 냄새와 형태와 색깔까지 또렷한 실체란 말이야. 눈앞에 펼쳐진.


들어봐. 네게 가려고 서울행 버스를 탔어. 밤새 복통으로 잠을 못 잤더랬지. 눈 밑은 거뭇해지고 아이백(눈 밑 지방)은 부풀어 올라 에어백을 대신해도 될 정도의 몰골로 차에 올랐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약을 먹었더니 순식간에 노곤해지면서 잠이 쏟아지더라.







꿈속에서 난 어린 날 살았던 방골집 마당에서 동생들과 동그랗게 모여 앉아있었어. 조감도로 그 장면을 보는 것처럼 알밤 같은 머리통이 바투 모여 발 밑에 있는 무언가를 두고 심각하게 말을 나누고 있는 게 보이더라.


가만히 시선을 이동시켰지. 세상에나. 우리들 앞에 놓인 건 그날 아빠가 사냥해 온 오리였어. 공기총에 관통당한 새. 힘없이 꺾인 목이 모로 눕혀진, 깃털은 여전히 따뜻한 새를 두고 우리는 울고 있었지.


죽음은 생태계를 이루는 모든 존재들에게 공평하게 찾아오는 시간의 결과라고 생각했지. 우리 곁을 떠나는 존재들의 저마다의 이유는 모두 신이 결정해서 그런다고 말이지.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그 뜻을 어찌 알겠느냐마는.


그러나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다른 존재에 의해서 그 순간을 갑자기 맞이할 수도 있다는 걸, 정확하게 알게 된 날이었어.


배에 난 조그만 구멍 하나가 그렇게 쉽게 새에게서 다시 날아갈 하늘을 빼앗아 버렸다는 것. 그렇게 한 사람이 아빠라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슬펐더랬지. 내가 먼저 울었던 거 같아.


동네 아저씨들을 전화로 모이라고 연락하는 아빠의 호탕한 웃음소리와 아궁이에서 끓고 있는 물통에서 올라오는 김이 공기의 밀도를 높이면서 응축되더라. 그 순간 나는 울다 말고 왈칵 토했지.


목을 타고 넘어오는 이물감, 생생한 이물감과 쓴 담즙과 함께 발 밑에는 끈적거리는 점액으로 뒤덮인 흰 덩어리가 보였어. 마치 알, 껍질이 사라진 알과 같은 덩어리를 보다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


그렇게 꿈에서 깼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던 내 발이 앞 좌석을 쳤지. 살짝 꺾인 발목을 타고 뻐근하게 밀려오는 통증으로 이맛살을 찌푸리며 발목을 손에 쥐었지. 알잖아. 우리 살살 달래줘야 하는 나이인걸.







그때였어. 내 발 밑에 이상한 광경이 보였지. 여러 갈래로 흩어진 물줄기. 버스 바닥에 내가 탈 때는 없었던 지도가 보여. 신대륙 발견도 아닌, 막 생성된 정체불명의 물줄기. 코 끝에 스며드는 냄새와 함께 내 발밑에도 고여있는... 물. 줄. 기.


아찔한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내 엉덩이 한쪽을 더듬었어. 가죽으로 된 랩스커트라 어느 정도 방수는 될 텐데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과 함께 말이야. 삐딱하게 든 엉덩이를 확인하다 안쪽까지 더듬어 봤지. 너무 우세스러운 일을 화들짝 놀라하고 있었단 말이지. 뒤에서 누군가 이 모습을 봤다면 나를 살짝 정신 나간 존재로 봤을지도 몰라. 자다 깨서 자기 몸을 막 더듬는 이상한 여자로 말이지.


내 손 끝에 닿는 건조함. 파바박 튀기는 정전기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다행히 내가 아니었어. 그렇담 대체 이 물줄기는 어디서 발현한 것인가 나는 확인해야 했지. 조용히 고개를 7시 방향으로 돌려 맨 왼쪽에 있는 좌석들을 눈으로 살폈어. 얇아진 물줄기 끝을 거꾸로 더듬어 올라가 굵어지는 곳을 바라보니, 정확히 내 옆좌석에 앉은 여자 밑에서부터 시작됐더라.


처음 내가 차에 올라 자리를 잡았을 때, 버스에 올라 복도를 걸어오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어. 지나치게 뻣뻣한 머리칼. 엄청나게 큰 키. 부담스러울 정도로 껴 입은 옷들. 눈빛에 스며있는 짜증과 은근한 분노가 그녀를 한번 더 쳐다보게 만들었지.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속으로 하는 말을 들은 기분이었어. 요즘 아이들 언어로 하자면, "짜져." 이 정도랄까? 바로 눈길을 돌렸어. 가져온 책을 펼치고 그녀가 내 옆자리 자신의 좌석에 앉아 한참을 자리를 정돈하는 부산스러움과 건너오는 먼지들에 코 끝이 간지러웠지.


얼마뒤 잠이 들었다 깬 거야. 그 사이 그녀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내 신발에까지 묻은 그녀의 좌석아래 고여있는 물줄기는 정말 그녀의 것일까? 말해봐. 냄새까지는 내가 맡아볼 수는 없잖아. 묻어있는 액체의 정체를 탐색하는 수고로움을 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또렷한 순간이었어.


나는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내가 들고 오른 보조가방 아래를 닦았어. 밀려오는 토기를 참으며 닦고 또 닦았지. 다행히 그 가방이 방수라는 게 얼마나 반갑던지 말이야.(여담인데 방수 아니더라 바닥 안쪽이 젖어... 있...) 여러 차례 닦아내니 어느새 내 앞에는 물티슈가 수북하게 산을 이루더라. 그걸 모아 마스크 껍질 안에 밀어 넣고 한숨 돌리며 네게 말하는 거야.


그런데 말이야. 내가 깬 뒤로 계속 핸드폰으로 카톡을 하던 그녀가 나를 힐끔거려. 내가 가방을 닦을 때부터 힐끔거리더니 이제는 노골적으로 나를 쳐다봐. 꼭 할 말 있는 사람처럼 말이야. 아, 어떻게 하지? 혹시 일어나서 갑자기 내 머리채를 잡거나 (왜, 깨끗한 척하고 지*이야!) 아니면 바닥에 있는 걸 다 닦으라고 시키거나, 이게 니 거라고 우긴다거나...


그래, 알아. 너무 황당한 상상이지? 그런데 무서워. 옆에서 커져가는 숨소릴 듣고 있다면 너도 이런 소리 못할걸? 화가 난 수소의 숨소리보다 더 커. 콧구멍을 막는다면 막아둔 휴지가 물대포처럼 앞으로 풍풍 튀어나갈 거야. 앞만 보자. 도착 30분 남았다. 제발, 앞만 보자. 나는 지금 나를 다독이는 중이야. 꿈에서 내가 뱉어 낸 점액질의 흰 알이 계속 눈앞에서 떠다녀. 그건 무슨 의미였을까?


이제 난 큰 딜레마에 빠졌어. 아무도 그녀의 물줄기를 아직 알아채지 못한 거 같아. 우리 앞뒤로는 나이 드신 어르신들뿐이라 그럴까? 만약 그녀가 이 상황을 말하지 않고 내린다면, 누군가 그다음에 이 자리에 앉게 된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될까? 내가 내리면서 기사님께 알린다면 이건 고자질일까, 아니면 대의를 위한 정의실현인 걸까?


터미널이 보인다. 만세! 곧 내릴 거야. 내가 만약에 용기가 없어서 기사님께 말하지 못해도 이해해 줘. 그녀의 체격을 보면 너도 움찔 놀라 먼 산 보며 다른 말할지도 몰라. 나 뼈가 많이 약해졌어. 한 대 맞으면 또각 부러질지도 몰라. 부러지면 안 되잖아. 그렇지? 그렇다고 빨리 말해.


아곰마, 이런 된장! 핸드폰을 물줄기 위로 떨어뜨릴 뻔했어. 옆에서 그녀가 갑자기 몸을 반쯤 일으켰거든. 그랬더니 조금 더 분명하고 얇은 물줄기가 의자 아래 고여있는 물줄기로 합류했어. 나 때리는 줄 알고 나도 모르게 움츠리다 핸드폰을 떨굴 뻔했잖아.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쳐. 헉헉!


검은색 후리스를 벗은 그녀가 자기 발 밑을 후리스로 닦기 시작해. 금방 더럽혀지는 후리스에 거품의 흔적과 바닥에 있던 다른 먼지덩어리들까지 함께 뭉쳐서 엉겨 붙어. 어, 어쩌려고. 그러면 이 추운 날 뭘 입고 가려고 그러는 거야. 나는 다급하게 가방을 뒤졌어. 좀 전에 닦느라 다 써버린 물티슈 봉지만 보이더라. 무어라도 옷이 덜 더럽혀질 수 있는 도움을 주고 싶은데 아무것도 없었지.







타인의 슬픔이 내 걸로 전이되는 순간이 있어. 마치 스위치가 켜진 듯, 내가 그 사람이 되어 그가 느낀 감정들을 그대로 느끼는 것만 같은 순간. 지금이 그래. 내가 그녀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만.


뒤늦게 자신의 발아래 고여있는 물줄기를 닦고 있는 그녀의 등. 한껏 올라간 스웨터로 휑하니 드러난 그녀의 살갗. 그리고 낡고 닳은 속옷의 일부. 등을 가로지르는 도드라진 푸른 정맥이 문신 같았지.


가려줄 수 없는 누군가의 등, 한기가 느껴져. 나의 용기 없음이 부끄러워서 더더욱. 오리를 바라보던 그때나 낯선 그녀가 자신의 발밑으로 그러모으듯 옷을 펼쳐 닦고 있는 물줄기를 지켜보는 지금이나. 어쩌면 나는 나란 인간의 위선을 지켜보는 걸 피하기 위해 착한 척 살아오고 있었던 건 아닐까?


차가 멈췄어. 나는 내 가방을 움켜쥐고 일어나 서둘러 통로를 걸어 나왔지. 내 발자국이 통로에 남았어. 그녀가 미처 닦아내지 못한 물줄기가 내게 이어진 흔적이었지. 내가 닦을 수 없는 화인처럼 남은.


넌 어떻게 했을 거 같아?










* 같이 듣고 싶은 곡


https://youtu.be/XwAFEcFclDA?si=gQTZOL5kyvyXpm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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