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교토는 어떤 색일까? 이제는 낯설어진 주홍의 6촉 전구들이 등처럼 반짝이는 빛길이 되려나? 그 길을 따라 잠든 이들의 머리맡을 지키기 위해 고요히 움직이는 작은 신들이 행렬을 이루는 모습이 떠오른다. 모험을 하기엔 어중간한 시간에 도착한 탓에 내가 볼 수 없는 시간대의 이 곳을 머릿 속으로 그려보는 걸로 아쉬움을 달래본다. 청수사 누각에서 저편의 교토시내를 바라본다. 가부끼 배우처럼 흰 분칠을 한듯 햇살에 반짝이는 공간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오가는 사람들에 밀리며 서 있으려니 살짝 현기증도 인다.
교토 시내 동쪽 오토와 산(음우산) 중턱에 778년에 지은 엄청난 규모의 사찰인 '청수사'를 교토의 첫 방문지로 정했다. 오사카에서 1시간 20분을 달려와 미리 섭외해 둔 일일 가이드님의 차량으로 움직이려고 예약을 해두었다. 엊그제 잘못 구입한 무려 우리돈 3만원짜리 전철표를 볼 때마다 속이 쓰리다. 제대로 된 여행자가 되고싶으면 기본적인 언어들은 습득하고 와야한다. 파파고 번역기를 너무 믿은 내 잘못이 크기에 암말 못하고 오늘은 안전하게 다니기로 다짐한다.
청수사라는 이름은 '키요즈미(淸水)', 순수한 물에서 유래했다는데 사찰 안 오타와 폭포에서 내려오는 샘물을 마시고 십일면천수관음보살상에 기원을 하면 소원하는 걸 다 이루어준다니 마음 속 가장 내밀한 나의 소원을 빌어보겠단 다짐으로 이 곳에 왔다. 사찰 입구를 지키는 엄청난 높이(약 31m)의 삼중탑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는데 곳곳에서 기모노를 입고있는 젊은 연인들이 눈에 띈다. 개중에는 한국 젊은이들도 섞여 기념촬영을 하느라 바쁘다. 게다라는 폭이 좁고 발가락에 끼어 신는 그 신발을 신고 오종종종 걷는 걸 보고 있으면 보폭이 큰 나는 저리 쫑쫑 걷는 일이 엄두가 안나기에 감히 입어볼 시도를 못하겠다. 그래도 환하게 웃으며 이국의 문화를 경험하는 청춘들의 얼굴엔 불편함 하나없는 맑음 뿐이다. 저런 천진과 낭만이 좋다. 가장 이쁜 나이 아닌가.(야~~ 야야! 내 나이가 어때서! 어디선가 고여사님 노랫소리가 환청으로 들린다. 엄마 내가 일본 온 지 모르는데...)
경내에 들어서자마자 맑은 샘물이 흘러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는 오타와 폭포를 찾았는데, 그 소리는 앞에 가득 줄 선 이들의 소음에 묻혀버렸고 세 줄기 샘물 앞에 늘어선 인파가 똑같은 바가지를 사용해 마시는걸 보니 줄 서기를 깔끔하게 포기하고 돌아선다. 세 개의 물줄기가 왼쪽부터 각각 건강, 학업(미용), 연예(출세)라 해서 꼭 하나 마셔볼까 했더니 이 분야 운은 내가 알아서 가꿔보는 걸로 해야겠다. 국보로 지정된 본당 앞 부타이로 향한다. 높은 계단을 굽돌아 오르는데, 햇살 아래 견고하게 맞닿은 나무들이 보인다. 수많은 참배객이 한자리에 모여 스모나 오도리 등의 행사도 관람할 장소가 필요해 본당 앞을 이렇게 무대처럼 넓혔다고 전해지는데 그 곳을 밑에서 바라보니 더 경이롭게 다가온다. 관광 안내책자에는 일본의 전통 건축방식인 카케즈쿠리를 적용해 139개의 느티나무 기둥을 가로세로로 조합해 만들었는데 못을 사용하지 않고 잘 짜 맞춘 구조로 지진에도 안전하게 버틸 수 있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알려진 바로는 이 방식이 도래인이라 불리는 백제인들이 이들에게 전해준 기술이라하니 위풍당당한 목조 건물 앞에 내 가슴도 부풀어 오른다. 백제인의 후손 충남사람이란 자부심과 함께. 에도 시대에 관음상에 기도한 후 부타이가 있는 절벽에서 뛰어내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많은 이들이 절벽에 몸을 던졌다는데(대체 신심은 왜 이런 시험을 요구하는지!) 빽빽한 나무 덕분에 대다수가 살았다 한다. 가늘고 길게 살고싶은 나는 눈을 반대편에 두고 느릿한 달팽이가 되어 계단을 올랐다.
그런데 아뿔싸, 십일면천수관음보살상의 화려하고 섬세한 세공을 초접사로 좀 찍어보겠다 노리고 왔는데 본당에서 33년에 한 번, 1년간 공개한다고 한다. 이건 안내책자에서 못 본 내용인데 다음번 공개년도는 2033년이라니 모사품을 보고 있자니 사진에 담고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당신은 진짜가 아니니까 패스. 아쉬운 마음에 입이 나와 옆을 보니 무게가 꽤 듬직해 보이는 거뭇한 불상이 하나 보인다. 출세의 신이라 불리는 불상인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기원을 했을까 생각이 든다. 유독 반지르르한 윤기가 흐르는 후덕해 보이는 배가 인상적이라 문득 배를 쓰다듬어보고싶단 불경한 생각이 들어 얼른 손을 주머니에 넣는다. 거기까지 가서 사회면에 나올 수는 없지않은가? 불상에 달라붙어 있는 청개구리 현장에서 체포!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경내를 천천히 돌아 살핀 뒤 키요미지자카라 불리는 좁은 골목길을 따라 내려간다. 양 옆 즐비한 상점들과 수많은 인파를 바라보다, 산넨자카 입구로 발길을 돌렸다. 상대적으로 관광객이 적은 이 골목을 보니 지우펀이 떠오른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던 공간처럼 옹기종기 모여있는 낮은 높이의 전통가옥들이 참 앙증맞게 다가온다. 여기에도 있는 스타벅스라니. 신기한건 이 곳 세이렌의 모습이 일본 민화 속 인어를 닮았다는 점이다. 상술이 파고드는 얕고 빠른 수에 웃음이 나온다. 역시 스벅, 마케팅의 귀재같으니.
내가 걷고 있는 산넨자카의 본래 이름은 '산네이자카'로 임산부들이 순산을 기원하기 위해 산사로 오르는 길이라는 뜻이라 한다. 다이도 3년인 808년에 만들어졌다 하여 산넨(三年)자카(언덕길)이라 불린다. 그 옆 니넨자카는 다이도 2년인 807년에 만들어져 이년(발음 조심)골목길이니 이 얼마나 정직한 명칭인가? 여튼 이 길에서 넘어지면 각각 3년, 2년간 재수가 없다고 해서 골목길 끝에는 상점마다 조롱박을 즐비하게 늘어놓고 혹여나 넘어진 이들에게 액운을 떼어낼 묘수로 박을 깨라 권하고 있다. 차라리 떼구르르르 굴러 내려가면 액운이 돌고 돌아 행운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반질반질한 돌계단에 어음이 내려앉아 일제히 불이 켜지면 어떤 느낌이 들런지 궁금해진다. 다음번에 일본에 올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교토를 주무대로 꼼꼼히 돌아보고싶어진다. 천년의 수도 속 시간이 멈춘 곳들에서 느릿하게 숨 고를 날을 그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