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든의 꿈

by Bono




홀든의 꿈





익숙하지 않은 공기의 결을 느끼며 하루종일 돌아다녔더니 밤 비가 내리는 저녁, 서늘해진 기온이 느껴지며 한기가 엄습한다. 날개뼈로 고여드는 냉기는 어디에서 시작된 걸까? 낯선 도시의 거리를 걷는 관찰자가 되어 살아보니 보이지 않는 투명한 막이 저들과 나를 갈라놓고 있는 기분이 들어서일까? 외국에 나가 사는 이들이 이방인으로 느끼는 외로움이 이런 느낌일까?



통하지 않는 언어 덕분에 파파고 번역기를 사용해 더듬더듬 할 말을 전하고, 다시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려니 모든 소통이 느려진다. 느려진 덕분에 상대방이 호흡을 고르며 선택한 단어들이 내 귀에 들리기 전 그들의 눈빛과 어조, 몸짓을 먼저 보게 된다. 로밍해 온 덕에 나란히 표시되는 한국과 오사카의 시차. 차이가 전혀 나지 않는 시간인데 이들과 우리의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한 걸까? 노트에 끼적이는 질문들만 수백가지다. 첫날 역장과 한참 통하지 않는 언어로 지하철 표로 실랑이를 하다가 용감하게 직진해서 잘못 발권한 3000엔 짜리 지하철 표가 주머니에서 뾰족하게 접혀 허벅지를 찌른다. 더는 걷기를 포기하고 일찌감치 오사카에서 유명세를 얻고 있는 복집 '후구쿠지라'로 간다. 구글로 미리 예약을 해둔터라 예약 시간이 되기 전에 조금이라도 골목골목을 더 돌아보고 싶었지만 몸이 따라주질 않는다.




이마를 스치는 가게 이름이 적힌 천을 걷어내고 안으로 들어가니 좁은 통로 양 옆으로 빼곡하게 자리한 좌석들이 눈에 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다양한 사투리의 한국말에 순간 멈칫했다. 이곳도 모두 정복했구나란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도 난다. 오사카에 사는 사람들이란 유투브 채널의 진행자 마츠다상이 직접 맛집이라 소개한 곳이라 나름 유명세가 생겼겠구나 했는데 생각보다 더 복작대는 걸 보니 유투브의 힘을 새삼 느낀다. (마츠다상, 여기 어디 앉아있으려나 열심히 두리번대는데 이자카야 먹고 있는가보다. 어딜 가야 만나지?)



자리에 앉아 호기롭게 세트메뉴를 주문했다. 내일부터 간장종지에 고추냉이 풀어서 삼각김밥을 찍어 먹을지언정 하루에 한끼는 여행자인 나를 위로하는 선물을 하고싶어 예약한 곳. 이제 마음놓고 먹어본다. 쫄깃한 복껍질을 전체요리로 시작해서, 복 사시미, 복 튀김, 복 마늘구이, 샤브샤브, 죽까지 한상 거하게 차려지는 요리들과 만난다. 하나씩 맛보는 처음 만나는 미식의 세계에 눈은 동그랗게 커지고 비린내 하나 없이 담백한 맛이 좋아 연신 젓가락질을 서두르다 한기를 몰아내 줄 따뜻한 사케를 시켰다.

복지느러미를 말려 따뜻한 사케에 넣고 우려먹는 히레슈. 뚜껑을 열고 불을 한번 붙인 뒤 우려내 먹기에 불맛까지 은은하게 번져오는 이 한 잔에 얼굴은 발갛게 달아오른다.



서서히 등을 타고 올라오던 한기가 가라앉는다. 상이 정리되는 사이사이 나를 둘러싼 이들의 온갖 이야기가 들여온다. 옆팀은 제약회사 근무 직원들의 세미나여행(자리에 없는 부장님이 오늘 안주인 모양), 대각선에 앉은 이들은 부부동반 모임(그러나 그날 한 부부가 대판 싸운 모양임), 내 뒤로 앉은 팀은 어린 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여행(아이는 챙기지 않고 혼자 열심히 먹는 남편에게 부인이 화가 나 있음)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내게 전하는 삶의 이야기들이 흥미로워 가만히 듣다가 미소를 짓는다.



허기가 사라지자 여유가 생긴 난 핸드폰을 열어본다. 방학을 주면서 일일 과제들을 내 준 덕분에 아이들이 숙제 검사용으로 보내온 카톡이 수백개다. 열어서 일일히 확인해 보기엔 데이터가 아까우니 눈으로 스킵하는데, 한녀석이 보낸 문자가 눈에 띈다. 마지막에 첨부한 문구일텐데, "선생님, 보고싶어요."란다. 어쩐지 뭉클해지는 마음이라니. 내내 쏟아부은 시간들이 이렇게 서로 한발자국씩 떨어져 있을 때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는가보다. 내가 하는 말을 안듣는다고 혼냈던 녀석이 이런 말을 하다니... 전해준 마음은 흩어져 사라지는게 아니라 가만히 다가가 스며드는가보다. 당장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결과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어느 날 아무때라도 그 마음의 주인에 대해 떠올렸을때 보고싶고 그립다면 내가 살아가는 동안의 든든한 의지처가 생긴 거라 믿는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 도무지 적응하지 못하고 세상의 낙오자로 낙인 찍혀서 헤매던 어린 소년이 떠오른다. 집을 나와 세상에서 만난 이들이 나이만을 물으며 왜 어린 네가 이 곳에 지금 와 있느냐란 질책만을 할 때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동생 피비가 전해준 돼지저금통의 돈으로 차표를 끊어 세상과 직접 부딪혀 보며 자신을 찾아내고싶어 달려나온 소년이 처음 만난 세상의 각박함과 황량함이 늘 마음에 남았더랬다. 누군가 그에게 따뜻한 밥 한끼나 다정한 말 한마디를 전해주었다면 그의 방황이 조금은 덜 힘들지 않았을까? 홀든은 널따란 호밀밭에서 저 끝을 향해 달려가는 수많은 아이들을 지켜주는 파수꾼이 되는 상상을 한다. 어른은 자기 혼자여서 아이들이 달려나갈 때 안전하게 낭떠러지 근처에 가지 않게, 가더라도 순식간에 잡아채 안전한 곳으로 돌려놓기만 할 수 있다면 하루종일 그 일만 하고있어도 좋겠다고 한다. 어쩌면 자기에게 누군가 그렇게 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는지도...




홀든이 꿈꾸던 호밀밭의 파수꾼으로 살아가고 있다 생각했다. 하지만 때론 내 손을 벗어나 저 멀리 달려나가는 아이들도 있고, 나의 다그침에 튕겨나가는 아이들도 생겨난다. 이런저런 일들로 지친 상태로 떠나온 여행지에서 녀석의 문자 하나에 생각이 깊어진다. 여물지 않은 생각주머니를 동여메고 가만히 히레슈를 마셔본다. 입 안에 머금고 있던 온기가 목을 타고 심장을 지나 묵직하게 배 속으로 가라앉는다. 살짝 밀려오는 취기에 미소가 나온다. 아, 취하면 이래 해실해실 웃게되니 큰일인데. 뭐, 아무렴 어떤가? 나는 지금 여행 중인 홀든. 다시 돌아가 밭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기 위한 힘을 모으는 중인걸.










- 어른이 처음이야 : 위수


https://youtu.be/5rhpReQFaQ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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