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사는 곳에는 모산조형미술관이 있죠. 개화공원 안에 자리한 조그마한 미술관인데 제법 다양한 프로그램을 전시가 구성이 됩니다. 옛 탄광촌 성주에 자리한 아담한 공원과 미술관은 계절마다 다른 모습으로 저를 반겨요. 혼자 있고 싶거나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면 성주터널 넘어 열심히 달려가죠. 여러 전시들 중 기억에 남는 전시가 있습니다.
달이 바뀌면 새로운 전시가 시작이 될 걸 알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가봅니다. 보통 새로운 달의 3일 정도가 제일 좋아요. 단장을 끝내고 방문객을 편안하게 맞이하는 시간이 그때쯤이거든요. 그런데 이 전시는 살짝 불편했어요. 전시실 입구에서 서자 바로 눈이 마주친 낯선 존재들에 흠칫 놀라 멈춰 섰죠. 머리만 있는 구관조와 고양이, 날카로운 귀를 갖고 있는 개의 두상들이 저를 응시하고 있었죠. 캐나다에서 돌연변이로 태어난 털 없는 고양이 스핑크스를 닮은 고양이의 눈동자들, 확장된 홍채가 세로로 좁혀지는 순간을 순차적으로 보여주며 세워져 있어 직접 저를 본 녀석의 눈동자가 시시각각 변하고 있는 걸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더랬죠.
어째서 이런 작품을 만들었을까, 그 의도를 직접 묻고픈 순간이었어요. 보통 그림이나 조각상을 바라보면 작가의 의도 이전에 보이는 것들이 있는데 이 작품들은 그렇지 않았거든요. 간단한 작품해설집을 먼저 읽어보고 전시실을 둘러보기 시작했습니다.
"윤유담"작가의 <고요한 자상刺傷> 전에는 독특한 조각상들이 놓여 있죠. 마치 한 마리 고양이의 해부도를 보는듯한 속이 다 열린 조각상, 갑옷을 입은 해골, 머리만 있는 개들까지 눈매가 강조된 조각상들이 저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이 시선은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던 작가의 어린 시절에 트라우마처럼 남은 타인의 시선을 의미한답니다.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자신을 빤히 보던 급우들의 시선을 피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고양이 한 마리가 자신을 보고 있었대요. 그 고양이의 눈빛과 함께 당시 괴롭힘을 당하던 것보다 작가가 더 무서웠던 건 그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방관자들의 시선이었답니다. 그때의 시선들이 텅 빈 눈동자로 조각상에 담겨있죠. 어디로 움직이든 신기할 정도로 제게 따라붙는 눈동자의 온도가 너무 서늘해 살짝 소름도 돋았더랬죠.
어느 날 순식간에 몸집을 부풀린 기억이 우리의 삶을 덮치고 순식간에 마음을 저 나락까지 끌어내리는 순간들이 있죠. 작가는 작품들을 통해 작은 순간에 불과했으나 내 삶을 좀먹고 있는 두려움과 분노 등으로 채워진 그런 날의 기억들을 덜어내려고 합니다. 어떤 일들은 시간을 분절해 아무리 복기해 봐도 이유조차 알 수 없는 것들도 있는데, 우리는 그때 느낀 감정들이나 상처들을 쉽게 내려놓을 수 없기에 오래도록 끌어안고 아파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기억들로 자상刺傷이 생겼다면 우리들 마음을 어떻게 다시 보듬어 안아 일상으로 돌릴 수 있을까요?
시선에 의한 자상은 소통이 일방적인 낙인과 같은 것들이기에 제가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죠. 때론 억울하고 분해도 제게 찍힌 낙인 같은 시선을 의연하고 담대하게 이겨낼 수 있는 마음의 힘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전시장을 돌며 작품들을 보는데 한 편의 영화가 생각납니다. 프랑스에서 1973년에 <판타스틱 플래닛>(국내개봉 2004)은 애니메이션 최초로 칸느영화제 수상을 한 작품인 "르네 를루" 감독의 작품이죠. 원제가 "La Planete Sauvage"인데 '야만의 행성', '미개의 행성'정도로 해석하면 될 것 같아요.. 영화에서 파란색 몸에 빨간 눈을 한 귀가 마치 생선아가미처럼 생긴 거인, 트라그족이 다스리는 이얌행성이 나오죠. 이들은 머리에 헤드셋을 쓰고 학습을 하고 그렇게 얻어진 고도로 발달된 지능으로 완성된 문명을 통해 제국을 이끌어 나가고 있죠. 그리고 그곳에는 또 다른 생명체인 인간의 형상을 한 옴 종족은 트라그족의 지배를 받는 아주 미개한 작은 동물로 등장하죠. 요 두 존재의 크기 차이부터 엄청납니다.
영화의 주인공 옴인 '테어'는 갓난아기 때 장난으로 자신을 안고 지나가는 엄마를 괴롭히던 트라 그 족 아이들에 의해 엄마를 잃고, 어린 트라그 '티바'에게 구조되어 그녀만의 옴으로 키워지죠. 그러던 중 '테어'는 우연히 티바 옆에 있다가 트라그족들의 공부 수단인 '헤드셋'과 가까이 있다가 트라그족들의 지식을 배우게 되죠. 트라그족은 헤드셋을 통해 온갖 종류의 지식을 습득하고, 명상을 통해 다른 트라그족과 이얌행성이 아닌 곳에서 결합을 해 에너지를 얻어 생활해요. (이때 또 다른 행성에 있는 트라그족의 본체 격에 해당하는 존재들이 결합하는 장면이 굉장히 신성한 충격이었어요. 음... 음... 음....)
성인이 된 티바가 명상에 빠져있던 틈을 타 우리를 탈출한 테어는 야생옴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해서 그들과 무리 지어 살아가게 되죠. 이때 테어가 훔쳐 온 티바의 헤드셋으로 인해 옴족은 폭발적인 지식습득을 통해 자신을 괴롭히던 여러 존재들에 대항하며 살 길을 찾아 나서게 되죠. 셀 애니메이션기법(배경이 되는 그림은 그대로 두고 그 위로 움직임이 생기는 오브젝트나 캐릭터만 따로 그려내는 방식)으로 제작된 독특한 화면의 색과 형태들은 한 장, 한 장이 인상적인 모던아트예요. 개인에 따라 호불호가 많이 갈리겠지만요.
영화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들은 테어를 애지중지하는 티바의 행동들이었죠. 테어가 딸꾹질을 하자 거꾸로 잡아 물속에 넣어 멈출 때까지 기다리고, 보호를 명목으로 테어의 목에 올무를 씌워 자신이 호출기를 누르면 무엇을 하고 있었던지간에 자기 발 앞으로 질질 끌려오게 만들죠. 천진하기에 가장 솔직한 방법의 감정표현, 한 톨 새어나갈 틈이 없는 완벽한 속박을 보여주던 티바는 그녀로부터 달아나려는 테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테어가 자신들의 종족에게, 혹은 바깥세상으로 나가려고 하는 모습에 되려 배신감만 느끼죠.
상대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자신과 다른 존재로 인정하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가 느끼는 감정들을 고려해보지 않는 일방적인 시선. 바라보는 시선의 온도차이가 이렇게 서사의 줄기를 다르게 비틀어버리죠. 영화 볼 만해요. 불편하게 보시고 오래 기억할만한 그런 영화입니다.
응시의 온도를 생각해 봅니다. 영화에서처럼 상대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자기 기준에서만, 자신의 문화권에서만 통용되는 것들로 바라보니 사랑은 속박이 되고, 존재의 성장을 막아버리죠. 또 전시에서 만난 작품들처럼 타인에 대한 배려나 애정이 없는 무관심한 태도의 방관자적인 시선들로 인해 자신의 고통이 어떤 이들에게는 하등 고려할 대상이 아님을 느끼며 그런 눈빛을 받은 이가 세상에서 완전히 고립되어 버린 것만 같은 낙담을 느끼게 만들죠.
누군가에게는 별 것 아닌 응시, 찰나의 스침이 마음에 자상을 입고 힘든 시간을 보내게 만들죠. 어떤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볼 것인가, 어디까지 드러내고 마음을 열어 보일 것인가에 대해 생각도 해봅니다.
온라인상에서 만나게 되는 우리, 바라봄의 깊이에 대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영화와 전시를 통해 소통을 전제로 한 시선의 중요성을, 내 눈빛의 온도와 보는 폭의 확장에 대해 가만히 떠올려보는 시간 가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