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Mad-minutes

2. 가시

by Bono







골목을 돌아 집으로 향하는 공터에 이르니 어른들 몇 명이 새로 생긴 작은 간이건축물 앞에 서서

소란스레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집단독백을 하고 있는 유치원생들을 보고 있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이야기의 대상이 있을 텐데 분주히 켜진 지역방송들 사이 고주파의 중앙방송 목소리가 주위를 압도하고 있는 중이다.



며칠 전 집 앞에 갑자기 생긴 수리점이란 간판이 아직 낯설다. 버려진 공터에 뼈대를 잡고 판자를 덧대더니 금방 작은 집 하나가 생겨났다. 김병만의 정글하우스의 도시생활 실사판 같은 집이다. 세상 무엇이든 만든다는 난쟁이도 아니고 재주도 좋지. 뚝딱거리기 며칠 해서 집 하나가 생기 버리니 말이다. 우리 집도 저렇게 지어서 할아버지네 세 들어 사는 걸 좀 나 가살면 좋겠다. 어디 지을
곳 없는지 화전민처럼 땅을 개간하는 게 빠를까, 아니면 못질을 배워 기에 불법 증축을 하는 게 빠를까 가만히 가늠해 보던 어젯밤이 떠오른다.




그러나 가건물 앞에서 저렇게 욕을 하고 있는 찬옥아줌마를 보니 건물과 그 안에 있을 사람이 과연 며칠이나 무사할까란 걱정이 든다. 하룻밤 사이 부러움에서 걱정이라니. 아, 이 알량한 마음이여. 여자의 마음이 갈대여서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저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동네 대소사를 관리하 비록 나라에서 부여한 명찰은 없어도 이 동네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인정하는 타자공인 3동 이장이자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홍반장이다. 도 세고 입심은 3배는 더 센, 찬옥아줌마께서 저렇게 성을 내는 이유가 뭘까 궁금해 죽을 것만 같다. 엄청난 화력의 말발 앞에 재가 되어 흩어질 불쌍한 영혼을 위해 미리 축도문을 읊조리며 나는 까치발을 짚는다.



앞에 선 사람들의 어깨들 너머로 등을 보인채 엎드려 문 앞에 깨진 화분조각들을 줍고 있는 남자가 보인다. 팔꿈치까지 걷어올린 와이셔츠 등판에 부침개처럼 보이는 조각들이 묻어있고, 그의 발아래는 김치와 떡 같은 것들이 흙이 묻은 채 뒹굴고 있다.

"내가 진짜 일꾼이 새로 왔다 해서 동네 사람 인심도 전할라고 내내 공들여 음식 해왔더니. 니가 수리점! 하! 뭐를 고친다고? 조져놓은 니 인생이나 고쳐!"

찬옥아줌마가 자신이 인사차 만들어 온 음식을 상대방에게 직접 집어던진 모양이다. 아줌마 음식 솜씨는 근방에서 알아주는데, 애꿎게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것들이 아깝다. 저럴 거면 그냥 들고 가시지 왜 애꿎은 음식에다 화풀이란 말인가. 그리고 애당초 화를 낼 거면 왜 정성을 들여서 이걸 해왔을까? 아줌마는 저곳에 온 사람이 누군지 전혀 모르고 오셨던가보다. 3동 환영인사 사절단을 이끌고 말이다.


아줌마의 극대노한 데시벨 정점의 목소리에도 묵묵히 엎드려 음식을 줍던 이가 일어났다. 천천히 아줌마 무리들을 향해서 몸을 돌려서는 남자를 보는 순간 대나무가 떠올랐다. 겨울 숲 속 눈 덮인 공간에서 묵직한 눈의 무게를 견디고 살짝 휘어져 서 있어도 결코 구부러지지 않는 탄력 있는 대나무 줄기가 긴 몸을 따라 환시처럼 떠올랐다. 천천히 이쪽을 마주 보는 얼굴. 아! 준석이 오빠다. 주인집 할아버지네 아들 준석이 오빠가 수리점 앞에 서 있다.


할아버지도 이 사실을 알고 계실까? 아침나절 내가 학교 갈 때 밖에 나와보지도 않고 부산을 떨던
달구와 그런 달구를 어르던 목소리가 살짝 낯설 다했는데 할아버지가 아닌 준석이 오빠의 것이었던가. 정확히 2년 만이다. 2년 만에 다시 만난 얼굴이 낯선 사람처럼 멀게만 느껴진다. 모르는 문제를 갖고 달려가면 언제나 환하게 웃으며 차근차근 알려주던 흰 얼굴의 소년이 지금은 멀고 먼 티베트의 고산에서 수행을 하는 수도승 같다. 딱딱하게 굳은 입매. 입술을 따라 깊게 파인 선이 돌로 만든 조각상인 것만 같은데, 저 사람이 내가 알던 준석이 오빠 맞을까?


땅을 딛고 깨금발을 짚고 있던 발목에 힘이 더 들어간다. 어떻게든 저 얼굴을 더 정확하고 분명하게 보고 싶은데 준석오빠를 둘러싼 아줌마 무리들이 찬옥아줌마의 어투에 흥분한 듯 점점 포위망을 좁히듯 가까이 다가서버리는 통에 얼굴이 보이다 말다 애가 탄다.

"살피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얼굴을 보고 마음이 편치 않으신 듯 하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 쉬시는 것이 어떨까요?"


오빠 맞구나. 레 음을 내던 목소리가 지금은 낮은 라로 내려가 묵직해졌다. 화가 나도 늘 공손하게 이야기하던 어투 그대로이다. 화를 내며 손가락질하던 동작들이 일제히 멎었다. 성내는 자신들을 바라보며 어조 하나 바뀌지 않고 이야기하는 오빠를 보면서 미칠 듯이 성내고 있다는 자체가 머쓱해질 법도 하다. 그런 오빠를 흰자위 번득 대며 노려보고 있던 찬옥아줌마가 콧바람까지 날리며 돌아서 가버리자 남은 무리들도 곧 뒤따라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자리를 떠버렸다.



소란이 가신 공간에 나와 오빠만 남았다. 돌아서 가는 아주머니들을 배웅이라도 하듯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쥐고 서 있느라 그때까지 나란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던 오빠가 입구문을 향해 돌아서다 눈이 마주쳤다. 순간 무심히 그냥 고개를 돌리기에 다급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이름을 부르려고 입을 여는데 조금 빠른 속도로 고개가 나를 향해 돌아왔다. 아주 조금 눈이 커졌다. 그리고 전부터 당황스러울 때면 나오던 습관처럼 꿈틀대며 왼쪽 눈썹이 살짝 들렸다 재빠르게 내려온다. 나를 알아본 모양이다. 내가 누구인지 말이다.



오빠에게 지금 내가 뭐라고 인사를 건네야 할까 갈등이 인다. 말을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도 아니고 이럴 때 꺼내는 인사말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오랜만이야'라는 말을 하기엔 갑작스레 이곳에서 지워져 버린 존재에 대한 일절의 배려 없는 너무 평범한 말 같아서 꺼낼 수가 없다. 그렇게 내가 머뭇대는 사이 꿈틀대던 눈썹의 평온한 수평을 찾은 준석오빠가 무심히 돌아서서 문 안으로 들어간다. 탁! 미닫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문에 달린 유리의 흔들림으로 더 날카로운 금속성이 되어 메아리친다. 더 이상 들어오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 같은 소리에 난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걸음을 옮겼다.




써글 망개놈. 벌써부터 아는 척 방지 실드를 치다니. 저렇게 단호하게. 혼잣말만 푸지게 하며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할아버지 방문이 열려있고 마당에 나온 달구가 미친 듯이 나를 반기며 내 다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받아주면 어김없이 나를 놓고 붕가붕가를 할 거라 한쪽 발로 툭 그 배를 밀었다. 달구는 저만치 나뒹굴며 '왜 나만 갖고 그래?'란 불쌍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저런 배신자시키. 낯선 사람이 집 안에 들어오면 나한테 짖으며 알려야지, 그저 좋다고 꼬리를 돌리고 있었을 저 녀석 미간을 긁어주고 싶은 마음이 없다.



엄마는 마당에 있는 샘에서 부지런히 빨래를 하고 있다. 커다란 대야까지 등장한 걸 보니 이불 빨래를 하는 것 같은데 추워진 날씨에 팔다리 걷고 혼자 일하는 모습을 보니 괜히 화가 난다. 더군다나 담긴 이불이 우리 것이 아닌 할아버지네 꺼라니, 저러니 아줌마들 입방아에 매번 오르내리지. 화가 난 나는 엄마에게 다가가 바가지로 이불 위를 세차게 때렸다. 때아닌 거품 벼락을 맞게 된 엄마가 황당하단 얼굴로 날 쳐다본다.

"알고 있었어? 누가 오는지?"

"누구, 아. 봤어? 너 오면 오늘 저녁때 알려주려고 했어."

"미리 알고 보는 것과 남이 떠들어서 아는 건 어떤 차일까? 왜 모든 일들은 일어난 뒤에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하는 거지들?"

"그게 무슨 소리야. 뜬금없이."

"항상 그렇잖아. 사라져 버린 아빠, 없으니 그냥 살라는 엄마부터. 사라졌다 나타난 준석이까지. 다들 내 주변의 사람들은 왜 이렇게 멋대로지?"



내 말에 엄마가 얼어붙었다. 어떤 말을 해야 가장 아프게 상대방을 찌를지를 연구하던 나다. 내게 생긴 상처들을 똑같이 되갚아주고 싶어 늘 가시를 길러 날을 갈던 나이기에 내게 아무렇지 않은 듯 준석의 귀환을 말하는 엄마의 평온한 얼굴표정을 망가뜨리고 싶은 사악한 욕구가 생겨나 기어이 엄마를 찌르고야 만다. 가시로 깊게 찔린 엄마는 입만 연신 벙긋거리다 내게 등을 돌리고 아무 말 없이 빨래 위에서 제자리 걷기를 한다. 갈 곳 몰라서 허둥대는 아이처럼 허둥거리며 발갛게 변한 살갗에 잉크물 번지듯 하지정맥류가 온 종아리 핏줄이 올라오는데도 움직거린다.


누군가는 세탁기를 통해서 수월히 해야 할 일들을 이렇게 늘 수고롭게 발품 팔고, 손품 팔아 해내는

엄마. 소처럼 일해서 번 돈으로 코딱지만 한 집을 건사한다고 늘 애쓰는 모습을 잊고 찌른 가시에 나도 같이 찔린다. 찔린 자리는 금방 성이나 부풀어 오른다. 몽울이 생기듯 욱신대는 자리를 가만히 손으로 누르며 등을 돌린다. 이게 다 망할 대나무 같은 놈 때문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