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모든 알곡

by Bono




들길에 피어난 개망초 위로 엉덩이 무거워진 꿀벌들이 날아다니며 내는 소리들로 한여름의 밀도 높은 습기가 잠시 흩어지는 오후, 아침부터 배앓이하며 투명한 실을 잣던 거미집은 때 아닌 횡액을 맞은 듯 너풀대며 나리꽃 위로 내려앉아있다.


한없이 느른하다. 의미 없는 낙서들이 가득한 공책 한 권 발치에 던져두고, 커다란 일개미들이 끌고 가는 죽은 곤충의 사체를 지켜본다. 자기 몸 무게의 40배도 들 수 있다는 저 가녀린 허리, 턱의 힘은 어떤 구조로 이루어졌기에 드는 것이 가능한지 머릿속에 저들의 해부도가 그려지다 흩어진다. 백과사전 일부만 본 얕은 지식의 한계랄까?




자연은 하나 버릴 바 없이 골고루 나누며 살라 가르쳐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버릴 것 하나 없는 공평한 생의 순환, 나로 인해 네가 살고, 너로 인해 내가 사는 공존이 이 생태계에서는 가능한데 생태계 피라미드 최상의 우리는 왜 이걸 못하는 걸까? 개미들의 운반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궁금해 몸을 일으켜 따라갈 차비를 할 즈음, 저만치 털털대는 포터 소리가 들린다.


할아버지의 오래 묵은 기침 소리 같은 배기통 울림이 털컥, 멎더니 두 부부가 비장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린다. 그들이 내린 곳은 참외밭. 노랗게 물 오른 참외의 몸피에 부딪힌 햇살의 느낌이 좋아 들고 온 카메라로 여러 번 찍었다. 어두우면 어두운 대로, 밝으면 또 밝은 대로 가장 실하게 안이 꽉 들어찬 과실이 느낌은 어떻게 담아도 빛이 난다. 수고롭게 가지 치고, 거름을 주고, 변덕스러운 날씨를 이기도록 옆에서 살뜰히 지켜보는 이들의 노고가 담겨있기에 마침내 때에 이른 존재에게선 이렇게 밝은 빛이 나오는 게 아닐까?


부부는 말없이 밭 사이를 한 바퀴 거닐더니 차에 가 커다란 바구니를 가져온다. 거기에 하나씩 옮겨 담아지는 참외들. 재빠른 손놀림에 군데군데 뭉쳐있던 참외들이 금방 솎아져 버린다. 군집을 흩트리는 정교한 손놀림은 정말 경이롭다. 그런데 아직 반이상 남았는데 바구니를 거두고 차에 오른다. 간택받지 않은 남은 녀석들은 아직 덜 익은 녀석들인가 보다. 풀을 헤치고 지나간 걸음 때문인지 내가 있는 곳까지 향기로운 참외향이 번져온다. 입에 침이 고인다. 하나 뚝 따서 옷에 쓰윽 문지른 뒤 껍질을 이로 갉아낸 뒤 입으로 베어 물고 싶어 진다. 어쩌면 턱을 타고 흐를지 모를 즙의 끈적거림까지 어린 날 먹었던 맛이 떠올라 손이 근질거리지만, 다른 이의 수고를 멋대로 탐할 수는 없기에 뒤돌아선다.



며칠 뒤, 다시 카메라를 들고 근처를 지나다 더 영글어졌을 참외색이 궁금해 그곳으로 가보았다. 그제 내린 비로 먼지가 씻겼으니 더 고운 결로 있을 것 같아 설렘 가득한 마음으로 갔는데, 나는 놀라고 말았다. 부부가 가져가지 않았던 참외들은 그 자리 그대로 있는데, 멍이 들고 어떤 것들은 새들이나 다른 짐승의 손을 탔는지 참외씨가 뚫린 구멍 사이로 흘러내리며 곯아가고 있었다. 한입 베어 물고 싶게 탐스럽던 빛들은 금방 꺼져있고, 바구니에 담겨도 충분히 좋을만한 몸피는 말라버려 흰 선이 아닌 갈빛의 고랑 같은 옴폭 패인 형태로 버려져 있었다.





사물에서도 어떤 것들은 선택을 받아 쓸모 그대로 인정을 받고, 어떤 것들은 이렇게 가라지로 버려져 사라져 간다. 선택의 주체가 때에 따라 이리 보이지 않는 선으로 이들의 향방을 결정하는 모습을 곰곰이 생각해 보다 오늘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나가던 녀석의 뒷모습에 생각이 미친다.


5년을 가르친 아이. 예고로 진학해, 첫 1학기 수학 시험에서 전교 1등을 하는 기염을 토한 녀석. 그림을 마음껏 그리기 위해 진학했지만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전학까지 고려할 정도로 많은 우여곡절의 시간을 보냈다. 보통 예고의 대입 진학과정에서는 영어와 사회탐구영역, 그리고 실기점수가 중요하다 알고 있어서 수학보다는 다른 과목을 해야 하지 않느냐 물어도 괜찮다던 녀석. 담임선생님과의 상담을 통해 내 말처럼 영어와 사탐만 입시에 반영한다는 말을 들었다 한다. 큰일이다. 영어는 고대 수메르 문자 보듯 대하는 녀석이 이제야 영어를 다시 해야 한다니 앞이 캄캄하다.



황급히 과외선생님을 구하고, 그전에도 여러 번 영어학원에 다닌 적 있지만 얼마 못 가 그만두고 했기에 이번에 가면 수능 볼 때까지 진득하게 다녀야 한다 다짐을 받는다. 자신 없으니 먼 데 하늘을 바라보며 슬그머니 "니에에에"라며 대답을 빼는 녀석. 장난기 가득한 녀석이 귀여워 볼을 꼬집어준다. 배시시 웃는 미소가 다람쥐보다 더 귀여운 아이. 그 아이의 마지막 수업이 오늘이었다.



작년에 갑자기 피어싱에 욕심이 나 나는 고통을 무릅쓰고 양 쪽 귀에 2개씩 피어싱을 했다. 전에 있던 것까지 총 3개씩 모두 6개의 별들이 귀에서 반짝인다. 그걸 본 울 엄마 왈,


"나이 먹고 까져서는, 이게 뭔 짓이여!"


라고 평했던 일이었다. 어디가 까진건지, 심각하게 고민해 보게 만들던 그 말씀이란! 날카로운 바늘침이 살을 뚫고 들어 와 관통하는 순간의 생생한 아픔과 함께 내가 살아있음이 통렬하게 다가오던 통각의 극점에서 난 또 다른 생기를 얻었다.


생일 즈음에 더 나이 먹기 전에 해보고 싶었던 나의 위시리스트였으니 내 나름은 만족스러웠는데 보는 이들은 다들 놀라워했다. 내 귀의 상처가 아물 즈음, 주말반으로 온 녀석의 귀가 벌겋다. 왼쪽에 2개. 못 보던 피어싱이 자리해 있다. 아주 조그맣게 반짝이는 보석들을 바라보다 뜨끔해졌다. '아 이래서 애들 앞에선 찬물도 마시지 말랬는데!' 나를 따라한 거 같은 걱정스러움에 내 귀 한쪽 북두칠성을 만들려던 계획을 포기했다.


그런데 저 녀석 언니는 눈썹이랑 혀를 뚫고 왔다. 어린아이에게 눈썹과 혀에 피어싱을 해 준 서울의 모 가게사장에게 속으로 욕을 바가지를 퍼붓고 아이에게는 "개성 있어 보인다"라는 말로 위안을 준 뒤 속으로는 곪아버리길 기원했다. 진심으로. 관리가 어려운 곳이니 당연지사 곪아버려 흉터처럼 부풀어 오르니 당해낼 재간이 없던 아이는 결국 피어싱을 빼버렸다.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이렇게 보낸 시간 끝, 아침 일찍 불러 중간고사 시험범위를 마무리해 준 뒤 미리 준비한 선물을 건넸다. 진저맨과 고래. 한 짝씩 할 수 있는 귓불 피어싱이다. 자신의 꿈을 향해 묵묵히 걷고 있는 나의 곡지 녀석에게는 파란 큐빅을 물고 있는 고래를, 귀여운 게 더 어울리는 곡지의 언니에게는 루비를 들고 있는 진저맨을 전해준다. 전날 수업이 마무리된 언니는 덤덤하게 인사하고 나갔는데, 오늘 수업이 마무리된 아이는 나가기 전 내게 와 어깨를 두드려준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혀를 빼물고 배시시 웃는 녀석.

"어깨 맨날 아프다고 하셨잖아요."

가만히 두드리는 손길에 미소 짓다,

"고만해. 아파!"라고 손사래를 치니 두 손을 배꼽에 모으고 90도 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넨다.


"선생님,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든 녀석의 눈이 빨갛다. 여태 잘해 준 아이가 너무 고마워 가만히 두 팔을 벌리니 와락 와서 안긴다. 작은 몸피, 아직 자라려면 한참 먼 것만 같았던 아이가 오늘 훌쩍 커버린 기분이 든다. 어깨를 두드리는데 콧물을 들이켜는 소리가 난다. 잘게 떨리는 어깨를 가만히 감싸다가 나도 울컥 눈물이 난다. 눈물이 메말랐다 싶었던 요즘, 아직 내 안에 이런 감성을 불러일으켜주는 일도 있다니. 건조했던 눈을 채우는 습기에 당황해 둘이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들을 붙들고, 내일을 향한 나침반을 보여주는 일. 아직까지는 버틸 만하다. 한 번씩 진심으로 다가오는 아이들이 있어서, 그 아이들로 얻는 온기가 힘들고 지친 날에 대한 가만한 위로 같아 이렇게 또 하루를 지켜낸다.



단 한 명도 참외밭에 버려둔 선택받지 못한 참외가 되지 않도록 두드려 깨우고 끌어당기는 일. 내가 보여주는 조그마한 빛에도 힘을 낼 수 있는 아이들이 있다는 생각으로 살아온 지난 시간들. 9월의 어느 날을 이렇게 담아 둔다.










- Dermot Kennedy - Giants

https://youtu.be/DEKtSs5E8SQ?si=ecoyy_Np0oyBe8F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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