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간다면 이것부터 할래요
전 회사를 퇴사한 뒤 딱 일주일을 쉬고 스타트업으로 첫 출근을 했다. 돌이켜보면 여느 이직러들과 같이 3개월의 수습 기간이 정말 쏜살같았는데, 제품의 beta 론칭을 목전에 두고 입사한 시기 탓도 있지만 확실히 스타트업에서의 시간은 기존 회사들보다 2배속으로 지나간 듯하다.
못하는 건 없어야 한다.
당시의 나를 사로잡은 생각이 딱 이랬다. 다른 팀원들과 월등히 차이 나는 경력, 조금 더 큰 조직에서 왔다는 경험, 그리고 스타트업이 처음이라는 딱지가 주는 중압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습게도 저 생각에 사로잡힌 나는 오히려 못 하는 것 투성이었다. 돌이켜보면 초짜처럼 자꾸 나를 증명하려고 애쓰느라 힘을 뺐던 것 같다. 일종의 허세랄까.
신입보다 경력에게 으레 더 큰 기대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경력자들이 마음껏 질문하고 탐색하는 과정은 '입사 초기'라는 버프가 있어야 가능하다. 다시 돌아간다면 이 시기를 잘 살려 아래와 같은 일들을 반드시 이직 첫 달에 해내고 싶다.
스타트업에서는 새로 입사한 사람의 적응을 도와주는 것을 온보딩이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입사교육 같은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 온보딩이 굉장히 단순하고 체계가 없어 미흡할 확률이 크다. 초기 스타트업일 수록 새로운 직원을 교육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게다가 사수-부사수의 개념이 거의 없는 조직이 많아, 대표 혹은 각 조직 리드의 '업무 소개' 정도로 갈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의 경우도 온보딩이 하루 만에 끝났다.
어... 이게 끝이라고?
스타트업을 다니면서 가장 많이 한 생각 TOP 5에 드는 말인데, 온보딩이 끝난 시점에도 저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익숙해져야 한다. 체계는 부족하지만 빨리 굴러가는 조직, 그게 바로 스타트업이다. 정해진 온보딩이 끝나더라도 스스로 질문거리를 만들고, 탐색해야 한다.
팀 구조와 구성원을 파악하는 것은 기본. 특히 각 조직이 기술 스탯을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지 알면 향후 그 조직과 협업을 할 때 굉장히 큰 도움이 된다.
회사에서 만드는 제품을 익히는 과정이다. 내 경우 기술 스타트업이었고, 낯선 도메인이라 공부하기가 너무 까다로웠고, 재직 기간 내내 테크니컬한 측면에서 배울 게 많다고 느꼈다. 이건 모든 경력직의 숙명이기도 한데, 사실 어느 정도 회사에 적응하고 난 뒤에는 난이도가 낮은 질문을 하는 것이 굉장히 민망하다. '아직도 이걸 모른다고?' 정도의 눈총을 받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초보 운전 딱지처럼 서툰 업무가 용인되는 이 시기에, 그래서 가장 많이 질문하고 흡수해야 한다. 나중에 가면 진짜로 민망해져서, 누군가에게 귓말로 슬쩍 물어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그런 일이 종종 있었다...).
엔지니어 혹은 해당 도메인의 전문가 만큼 배우려면 끝도 없겠지만, 그래도 한달 안에 팀원들이 회의에서 말하는 테크니컬 이슈를 이해할 수 있는 수준까지는 무조건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시도해보면 좋겠다.
슬랙(Slack), 노션(Notion), 아사나(Asana) 모두 이직하고 난 후 처음 제대로 사용해본 것들이었다. 그나마 노션은 이직을 준비하며 포트폴리오를 만드느라 개인적으로 사용해 본 적은 있지만, 업무에 적용해 본 것은 처음이었으니 사실상 업무 툴을 모두 새롭게 써본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사실 특별히 어려운 것은 없긴 했다.
다만 PO, PM이나 기획자처럼 업무를 매니징 해야 하는 포지션일 경우 다른 포지션보다 업무 툴을 월등히 잘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 조금 더 파고들 것을 추천한다.
사실 스타트업은 거창한 연혁이랄 게 없다. 그리고 스타트업에서는 이 회사가 몇 년도에 무슨 장관상을 받았고 하는 수상내역에 딱히 주목하지 않기도 한다(물론 받은 적이 없기도 하고). 그보다는 제품의 연혁에 주목하면 좋을 것 같다. 이 제품이 현재 어떤 생애 주기에 있는지를 파악하고, 기존에 실패한 경험이 있다면 왜 그랬는지를 새로운 팀원의 입장에서 한번 살펴보는 것이다.
2배속으로 지나가는 회사 생활만큼, 제품 연혁에도 이전 회사에서 경험한 것들보다 훨씬 많은 히스토리가 있었다. 이걸 모르고 지나가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도 있고, 팀원들과 대화할 때 정보의 차이에서 오는 갭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과거에 어떻게 일했는지를 반드시 보아야 한다.
흔히 스타트업은 '미국식 문화'를 지향하고 있어 개인적이고, 수평적이며, 정치질 따위보다는 업무 몰입에만 신경 쓰면 된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 다른 글을 통해 제대로 다룰 예정이지만 오늘은 '개인적이고'에만 집중하고자 한다.
작디작은 스타트업이야말로, 팀원들과 소통하고 의지하며 일하지 않고는 버티기 힘들다. 큰 조직에서야 나 아니어도 일해줄 사람이 많고, 업무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가끔은 쉬엄쉬엄 지나가도 티가 안 나지만, 스타트업에서는 나의 모든 업무가 사실상 모두에게 틈틈이 공유되기 때문에 월급루팡을 할 수가 없는 구조다(만약 당신이 다니는 스타트업이 월급루팡을 할 수 있는 구조라면, 이는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을 확률이 높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조력자이다. 조력자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눠볼 수 있다.
내가 모르는 팀의 히스토리를 상세하게 알고 있으면서, 나의 업무를 도와줄, 말하자면 '오른팔'같은 조력자는 역시 팀 내에 있어야 한다. 소위 말하는 '짬바'가 있는 조력자 말이다.
특히 나처럼 팀 리드를 겸하는 경우, 팀원들과 직책의 차이에서 오는 정보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이럴 때 팀 안에 벌어지는 업무 외적인 기류 등을 팀원의 입장에서 소상히 전달해 줄 조력자가 있다는 것은 분명히 든든한 일이다. 이런 조력자를 가진 리더와 아닌 리더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나의 경우 이런 조력자들을 팀 안에서 찾기까지 조금 오래 걸렸는데, 역시 팀 안에서 믿을만한 사람은 빨리 찾을 수록 좋다. 나의 업무 방향이나 성향에 대해 팀원으로서 냉정하게 평가해줄 수 있으면서도, 팀원들끼리 일어나는 일에 대한 정보를 누구보다 빨리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보통 회사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누구와 나누는가? 역시 같은 회사 사람이 최고다. 친구들에게 말하자니 설명해야 할 배경이 너무 많고, 가족들에게 말하자니 걱정을 살까 말을 아끼게 되곤 하는데, '회사 사람이 베프(Best friends)'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런 면에서 회사 일로 받은 스트레스를 나누고, 회사에 대해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조력자를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팀이나 나의 위치를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봐 줄 수 있는 것은 덤이다.
중요한 건 직접적으로 업무 이해관계가 겹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조금 더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나의 입장을 들어달라고 징징댈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경우 우연한 기회에 회사에서의 고충을 터놓게 된 준이라는 조력자를 얻었는데, 퇴사의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여전히 인생의 좋은 조력자로 지내고 있다.
주변 동료들이 스타트업으로 이직하고 나서 '수습 기간을 통과하지 못하는 상상'으로 괴로워하는 것을 보았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일반적인 회사에서의 3개월 수습 통과가 형식적인 것에 가까웠다면, 스타트업에서는 조금 더 날카로운 잣대가 있는 느낌이랄까. 결국 바쁘게 돌아가는 스타트업의 사이클처럼 이직자들이 얼마나 빨리 적응하고 현업을 시작할 수 있는지가 관건인 셈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직 첫 달이 끝나고, 수습 기간을 지나서도 스타트업 적응기는 계속되었다는 점이다(...). 매 순간이 새롭고, 때로는 괴로웠다.
그 에피소드들은 다음 글에서 만나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