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이직, 이것만은 꼭 챙기세요
이직에 필승법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겪어야만 증명되는 게, 그것도 퇴사할 즈음이 되어야 이것이 꽤 괜찮은 결정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직이다.
9년간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뒤로하고 스타트업으로의 이직을 결심했을 때 사실 불안하진 않았다. 오히려 권태에 가까운 기획자로서의 삶을 다시 시작할 기회처럼 여겨 설레는 마음이 더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 차에 스타트업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 두려운 건 사실이었기 때문에 실패하지 않기 위한 나름의 원칙이 필요했다. 그 원칙은 다음과 같다.
서비스의 방법론을 다루는 곳보다, 자체적인 기술력으로 승부하는 곳이 망할 확률이 적다고 생각했다. '문송'한 내가 생각한 가장 직관적인 기준이었다.
여기에는 세 가지 확실한 조건이 붙었다. PO(Product Owner)나 PM(Product manager)로 포지션을 변경하고 싶었으며, 내가 일해보지 않은 새로운 도메인을 공략하고 싶었다. 이미 게임과 커머스의 도메인을 밟았으니, 새로운 도메인을 하나 더 추가하면 근사한 이력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기왕이면 스타트업 이력을 제대로 쌓아보고 싶었다. 내가 할 일이 많은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시리즈A 수준의 신생 회사를 위주로 찾았다.
아무리 성장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회사라고 할지라도 현재의 연봉에서 깎고 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기왕이면 다홍치마, 연봉과 복지는 역시 다다익선.
위의 원칙을 기준으로 나는 Pre-A, 직원수 10명 내외, 생성 AI(Generative AI) 기술을 이용한 SaaS를 만드는 스타트업의 PO 포지션으로 일하게 되었다.
과장 승진 후 멀쩡히 회사를 다니다 갑자기 듣보잡(?) 스타트업으로 이직한 것이, 거기서 꽤 만족스러운 직장 생활을 시작한 것이 놀라웠는지 그 뒤로 주변인들의 질문이 끊이질 않았다. 어떻게 해야 나에게 맞는 스타트업을 찾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며 가급적 '따질 수 있는 건 모두 따져라.'가 모토가 되었는데, 이를 정리한 <스타트업 이직의 원칙_v1.0_20230904_일단 최종>을 소개한다. 순서대로 따라하면 된다.
역량 강화(핫한 도메인 습득, 포지션 변경, 스타트업 경력 그 자체..)
돈(연봉 인상, 스톡옵션, 기타 현금성 복지..)
명예(회사의 네임밸류, 회사의 규모, 직책 획득..)
워라밸(자율근무제, 통근시간, 근무강도, 기타 근무환경..)
인맥(훌륭한 동료, 기타 스타트업 재직 시의 네트워킹 가능성..)
업무(일 자체의 재미와 보람, 내가 잘하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지..)
위 우선순위를 벤다이어그램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나의 성장과 회사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어 각 항목에 해당하는 특징으로 나눠보는 것이다. 여기서 인맥은 나 자신이 회사 인맥의 일부이면서 회사를 통해 인맥을 쌓을 수도 있으므로 교집합으로 분류했다.
시리즈 B 이전(pre A - A)의 투자 단계
정식 제품을 아직 론칭하지 않은 곳
직원 수 50명 미만의 규모
내가 맡아본 도메인과 다른 도메인을 가졌으면서, 이 도메인의 성장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곳
시리즈 B 이후의 투자 단계
이미 론칭한 제품이 1개 이상 있으며 시장 반응이 검증된 곳(매출 및 영업이익, 인지도 고려)
직원 수 100명 이상의 규모
블라인드에서 '새회사'가 아닌 회사명으로 활동할 수 있는 정도의 네임밸류
위 원칙은 어디까지나 스타트업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로 가닥을 잡지 못한 분들을 위한 것이다. 당연하게도 위 내용뿐만 아니라 해당 도메인의 전망이나 회사의 재무 상태, 평판, 재직자들의 수준 등을 할 수 있는 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알아보는 것이 좋다. 정보가 많을수록 내 결정의 신뢰와 객관성이 쌓이기 때문이다. 특히 초기 스타트업일수록, 투자금이 많지 않을 확률이 큰 곳일수록 오너리스크(Owner risk)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만 때로 이 많은 것들을 뒤로하고 심장이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축하한다. 무모한 당신이야말로 스타트업 신 스틸러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안정적인 회사에서 스타트업으로 이직하는 것은, RPG에서 힐러를 하다가 탱커로 전향하는 것 정도의 변화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게 내 게임 인생을 더 풍요롭게 해준다면야 과감한 전직이 대수랴. 오늘도 기꺼이 리스크가 있는 신으로 뛰어들 준비를 하는 모든 이들을 응원하며 글을 마친다.
{ 오늘의 추천; 연봉협상 테이블에 앉기 전 읽어보면 좋을 책 }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 / 스튜어트 다이아몬드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