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세대 텃세 대처법
스타트업하면 막연히 생각나는 이미지 같은 것들이 있다.
젊은 기업, 젊은 감각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한 채 공격적으로 일하는 몰입감
닉네임을 쓰며 외국인 팀원과 영어로 회의하는 글로벌함
맥주 정도는 사무실에서 홀짝여도 될 것 같은 자유분방함
자기 할 일 다 하면 아무 때나 일해도 되는 근무시간의 유연함
보고를 위한 문서보다는 결과로 보여주는 담백함
하하 호호 으쌰 으쌰 즐겁게 일하는 친절한 사람만 있을 것 같은 'E'스러움
High risk, high return다운 놀라운 보너스가 주는 짜릿한 만족감
드라마 <스타트업>의 수지(예뻤지, 암)
처음 한 달은 놀라움과 감동의 연속이었다. 본인이 손수 구운 쿠키와 빵을 먹어보라며 가져오는 그로스 매니저(男), 궁금한 것을 물어보면 내 자리까지 와서 친절하게 알려주는 개발자, 점심에 다 같이 건강하고 맛있는 샐러드 도시락을 시켜 먹는 '요즘'스러운 분위기, 밤이든 주말이든 슬랙에 접속한 사람이 꼭 한 명은 보이는- 자율적으로 열일하는 문화, 그럼에도 자유롭게 라운지에 나가 커피 한잔하며 떠들어도 누구도 눈치 주지 않는 것까지...
와... 이런 회사가 있다고? 대한민국에?
처음 써보는 공유 오피스라든지, 맥북마저도 모든 게 그야말로 이상적인 스타트업 그 자체였다. 그래서 처음엔 그야말로 '스타트업 뽕'이 가득 찬 하루하루를 보냈다. '나, 이 회사 오길 잘한 것 같아. 내가 올해 한 선택 중 가장 잘한 일이야.'라는 드라마에 나올 법한 말을 실제로 하곤 했으니까. 전 회사 사람들과 만났을 때는 나의 이 놀라운 감상을 너무 낱낱이 드러낸 탓에, 지금 생각해 보니 조금 재수 없었을 것 같기도 하다(여러분, 미안).
그렇지만 실제 내 마음이 그랬다.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강남구에서 일하지만 꼭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것 같았달까. 이렇게 기대감이 정점을 찍은 뒤 목도한 스타트업의 현실은 그래서 내게 더 잔인하게 다가왔다.
헤이조이스에서 뱅크샐러드 CPO로 재직하셨던 박지수님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스타트업 커리어 수직 상승>이라는 제목의 강연이었는데, 그 강연에서 박지수님은 스타트업은 회사의 성장 시기에 따라 여러 갈등이 생긴다고 설명하셨고, 그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ㅁ 초기 단계 : 역할의 잦은 변화로 혼란스러울 수 있음
ㅁ 과도기(Pre A ~ 시리즈 C 이전) : 기존 멤버와 새로운 멤버 간의 갈등이 시작됨
ㅁ 성숙기(시리즈 C 이후) : 얼굴을 모르는 멤버가 생기고, 여러 절차가 생기며 회사에 남을지를 고민하게 됨
당시 A사는 '과도기'에 해당했는데, 겨우 20여명이 될까 말까한 회사에서 갈등이 있을까 싶지만 정말로 그랬다. 회사 규모가 10인 이하이던 시절부터 함께 한, 초기 멤버라고 할 수 있는 개발자 그룹과 그 이후에 채용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것처럼 가까워질 수 없었는데, 나중에는 두 그룹이 식사조차 같이 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런 갈등은 텃세로 비치기도 했다.
지나고 보면 이런 게 텃세이지 않았나 하는 순간이 내게도 있었다. 입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제법 큰 팀 빌딩 행사가 있었는데, 이 기회에 다른 팀 사람들과의 교류도 늘리고, 친해져야겠다는 생각으로 많이 들뜬 채 참여한 행사에서 처음으로 마음 상한 일이 일어났다. 팀 빌딩 행사이다 보니 다 같이 게임도 하고 술도 한 잔 한 상태라 긴장이 풀린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나보다 적게는 서너 살, 많게는 열 살 정도 어린 친구들과 서로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던 차였다. 해당 인원의 대부분이 나와 팀이 달랐던 지라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싶어 농담을 던진 게 화근이었다. (철저하게 내 입장에서는) 그네들끼리 던지던 농담에 동조하며 나도 한 스푼 얹은 것이었는데, 갑자기 그 농담의 당사자가 불쾌하다며 정색을 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 것이다.
그 순간에는 사실 회사의 첫 행사에서 이런 잡음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민망함과 뻘쭘함에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다른 동료들의 위로를 받기에 급급했다. 다 같이 이야기 했는데 왜 나한테만 저렇게 화를 낼까, 하는 억울함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다음날 어찌 되었든 당사자가 기분이 나빴으면 내가 잘못한 것이란 생각에 장문의 DM을 보내 정중하게 사과했다. 물론 상대방도 내게 정중히 사과해 주었다. 비록 '어제 제가 왜 화났는지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요'라고 생각한 문단이 본인도 미안하다는 문단보다 길었지만 말이다(ㅎㅎ).
전 회사에서 이런 토픽이 이슈가 되었다고 상상해 보면, 아마 자리를 박차고 갈 정도로 심각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전에 차라리 '과장님, 이 얘기 재미없는데요?'라고 맞받아치거나, 담아뒀다가 개인적으로 따질지언정 공적인 행사에서 새로 온 사람을 면박 주는 일은 본 적이 없다. 혹여 심각해졌다고 하더라도 다음 날 메신저 창에 '커피 ㄱ?' 하나 쓰고 서로 머쓱하게 커피 한잔하며 미안하다는 말없이 화해했을 것이다. 기분이 상해도 계속 마주해야 하는 팀원을 두고 일희일비하기엔 너무 피곤하니까. 또, 새로 왔으니 내가 봐주지, 하는 마음에서. 적어도 내가 아는 회사 생활은 그랬다.
그렇지만 나는 뉴비였다. 뉴비의 실수는 언제나 크리티컬 하다. 그리고 나는 전 회사가 아닌, 새 회사에 있었다.
모든 것을 차치하고 분위기를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은 역시 내 잘못이 크다. 만약 이런 민망한 상황이 된다면, 조금 억울해도 내 잘못이 있다면 겸허하게 인정하고 사과해야 한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어느 회사나 그렇듯 새로 입사한 사람이 '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텃세를 부리는 게 그냥 팀원도 아니고 초기 멤버라면? 치사해도 어쩔 수 없다. 아쉬운 쪽이 굽혀야 한다. 물론 텃세가 옳은 것은 아니지만,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새로오는 사람에 대한 거부감은 누구나 생길 수 있다. 특히 작은 스타트업이면 오죽할까. 누구나 새로 온 내게 친절하리란 법은 없고, 그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텃세에는 나의 경험담처럼, 본인의 실수가 장작이 되어 벌어지는 해프닝도 있다. 그럴 경우 기싸움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일단,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이 없을 가능성이 크고, 빌런으로 낙인찍혀 은따가 되거나 더 심각하면 3개월 수습 기간을 통과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오히려 이렇게 함으로써 뉴비인 내가 회사에 적응하기 위한 진정성을 보여줄 기회로 삼고 하나 배웠다고 스스로 토닥이며 넘기길 바란다.
텃세라고 부를 만한 일은 팀에서도 일어났다. 초기 멤버로 일찍이 합류한 헨리는 유난히 곁을 주지 않는 팀원이었다. 팀 리드를 겸하고 있던 나였기 때문에 팀원과 의무적으로 한 달에 한 번 1on1 미팅을 해야 했는데, 나는 주로 팀원들과의 스킨십을 위해 식사나 티타임을 겸하는 자리에서 진행하곤 했다. 문제는 헨리는 항상 이런 자리를 피하거나, 마지못해 1on1을 할 때에도 주로 비대면으로 진행하는 등 1on1의 퀄리티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대화 참여도 자체도 낮아서 1on1 내내 다른 팀원 혹은 겉핥기 식 이야기만 하다가 결국 내가 아닌 C레벨에게 본인의 불만을 다이렉트로 쏟아내는 일이 잦았다.
아, 이 팀원은 나를 리드로 인정하지 않는구나.
처음 이런 생각을 가졌을 때는 사실 자괴감이 들었다. 나의 부족함이 먼저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텃세에 대항하기 위해 처음 내가 선택한 방법은 '나를 증명하기'였다. 더 다가가려고 노력하고, 더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하지만 팀의 모두가 따라와도 혼자만 모난 돌처럼 구는 헨리를 보면서, 나는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음을 깨닫고 헨리와의 관계에 큰마음을 쓰지 않게 되었다.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텃세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조차 아까울 만큼 바빴기 때문이다. 챙겨야 할 팀원들이 열 명도 넘었다. 헨리 하나를 붙잡고 끙끙 앓는 것보다, 다른 팀원들을 챙기고 일하는 것이 팀과 회사에 더 유익하기도 했다.
그래서 헨리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어느덧 팀과 회사에서 모두 멀어진 채 그다지 좋은 모양새는 아닌 퇴사를 했다. 근본적인 문제는 기존 멤버들이 새로 합류한 멤버들을 인정하지 않고, 변화하고 있는 회사의 업무 방식과 분위기를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설령 텃세 부리는 그룹이나 팀원이 있다고 해도 너무 상처받지 않았으면 한다. 어차피 텃세를 부리는 그룹은 소수이기 때문에, 그 바깥 테두리에 있는 사람들끼리 자연스레 모이게 되어 있고, 다른 이들과의 이너서클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처음 한 달 동안 꿈꾸는 것처럼 회사를 다니다가 마주한 텃세에 당황스러웠던 초기였지만, 그래서 더 마음을 다잡고 일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빨리 환상을 깨준 덕에 '스타트업 뽕'도 급속도로 뺄 수 있었다. 결국 여기도 똑같다는 것, 오히려 작아서 더 살벌한 정글이라는 것,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배움을 얻은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