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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 클로이 Oct 16. 2023

스타트업의 이상과 현실 (2)

No rule vs Rule please

"클로이님, 우리 회사는 궁극적으로 No Rule을 추구합니다."


라고 C 레벨(경영진)이 리더 회의에서 운을 뗐다. 이 말은 '주 40시간의 근태 시간을 지속해서 미달하는 팀원에 대해 페널티를 주어야 한다'는 내 의견에 대한 답변이었다. 이어서 그는 '철저하게 능력 위주의 평가를 하고 싶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근태는 업무 결과와는 별개의 영역으로 평가해야 합니다. 일만 잘하면 된다는 메시지는 자칫 회사의 모든 규칙을 무시해도 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근태를 무시해도 될 정도의 스타플레이어도 아닙니다. 물론 저는 스타플레이어라고 하더라도 잘못한 것에 대한 페널티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요."


'지킬 건 제발 지키자'는 마인드인 나는 C 레벨의 말에 반박했다. 이어서 회사의 규칙을 책임지는 HR 리더와, 각 팀의 리더들이 말을 보태기 시작했다. 문제의 팀원 지우는 이미 몇 번이나 HR의 경고를 받은 터였다. 게다가 여러 이유로 예외적인 100% 재택근무를 허용한 팀원이기도 했다. 혜택을 받은 팀원의 일탈은 다른 팀원들의 반감을 사기 쉽다. 리더들은 회사의 기강에 대해 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설령 꼰대 같은 발상이랄지도 말이다.


그렇다면 C 레벨이 말한 No Rule은 무엇일까?


넷플릭스의 CEO 리드 헤이스팅스가 쓴 책 제목에 나오는 말로, "No rules rules" 즉 <'규칙 없음'의 규칙>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규칙 없음>이란 제목으로 번역해서 출간했다. 자유와 책임을 전제로 한 기업문화를 바탕으로, 팀원들을 구속하지 않아도 스스로 일을 하도록 조성하는 것을 주장한 책인데, 통제와 규정은 무능력한 팀원에게나 필요한 것이라는 다소 수위 높은 이야기도 나온다.


넷플릭스의 성공 신화만큼이나 이 이야기는 유명세를 치렀다. 그래서인지 비교적 일반 기업보다 인원이 적고 애초에 규칙이 많지 않은 스타트업 신에서는 앞다투어 No rule을 기업문화나 복지의 일환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승인이 필요 없는 무제한 연차제도'가 대표적인 예이다. 연차제도는 유급이기 때문에, 무제한 연차제도는 여러모로 파격적이다. 병가나 보건휴가처럼 무급휴가도 눈치 보고 쓰는 것이 일반적인 사회에서 유급휴가를 무제한으로 준다니! 사실상 연봉을 더 준다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C 레벨이 무제한 연차제도를 시행한다고 했으면 쌍수 들고 환영했을 것이다(휴가는 가도 가도 모자라...). 하지만, 회사의 몇 안 되는 규칙 중 근로에 가장 기본이 되는 '주 40시간 근무'를 지키지 않은 팀원에 대해 'No rule'을 들이미는 것은 여러모로 납득할 수 없었다. 애초에 넷플릭스의 환경과 차이가 있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넷플릭스에서 시행하는 No rule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정말로 근무시간에 대해 No rule을 적용할 것이라면, '주 40시간 근무'라는 근로계약서상의 문구를 삭제해야 맞다. 그렇지만 그런 일은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스타트업에서 No rule을 위해 선행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체계적인 평가 시스템과 보상

No rule이 가능하려면 다들 퍼포먼스를 위해 집중하는 동기가 필요하다. 회사에서 가장 강력한 업무 동기를 꼽자면 역시 연봉이다. 이 연봉을 결정짓는 평가와 보상 체계가 납득할 만한 수준으로 정비되어 있어야 한다.


철저한 능력주의로 팀원을 평가하기에 우리 회사의 시스템은 너무나 빈약했다. 스타트업이 으레 그렇듯 일반 기업보다는 잦은 평가를 하기 위해 매분기마다 평가 일정이 있었는데, 어떤 항목을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지에 대한 부분이 미비했다. 특히, 일반적으로 선택하는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였기 때문에 각 팀마다 상위 고과를 남발하는 경향이 있었다. 리더 역시도 팀원에게 리더 평가를 받아야 하는 입장인지라 이런 분위기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또, 팀 내부의 평가 기준만 있고 회사 전체의 평가 기준은 부족해서 각 팀별 성과 수준을 고려한 총괄 평가가 사실상 불가했다. '열심히 일해서 좋은 성과를 내면 내 연봉이 오를 거야.'라는 동기를 주기에는 부족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우의 규칙 위반은 팀원들의 사기를 저하시키기에 충분했다. '쟤는 저래도 아무런 제지를 안 하네. 이러면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만 손해 아닌가?'라는 여론이 조성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평가 제도에 근태에 대한 부분은 오랜 시간 빠져 있었기 때문에, 지우의 평가에 근태가 반영된 것은 꽤 나중의 일이다. 개인의 양심에 맡겨야 하는 재택근무의 맹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교육학에서는 학습 효과를 위해 적절한 상벌 제도를 운용하라고 한다. 회사의 규칙이 '벌'이라면, 반대로 보상은 '상'이다. 상벌 제도가 모두 공존해야 하지만 어느 한쪽이 부족하다면 다른 쪽을 채워서라도 전체적인 균형을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



구성원의 특성과 수준에 대한 이해

스타트업의 구성원들은 각양각색이다. 창업만 하다 오는 경우, 스타트업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한 경우, 다양한 회사를 다녀본 경우, 개발자로 전향하고 다시 근무를 시작하는 경우 등등...


비단 직장 생활에서뿐만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경험에 비추어 생각하기 마련이다. 때문에 회사의 구성원들이 기존 회사에 빗대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각 구성원의 배경을 살펴보고 그들의 행동을 이해한 뒤 이 조직이 No rule에 맞는 곳인지를 판단할 필요가 있다. 구성원들의 배경, 여기에 자유로운 스타트업의 분위기, 구성원들의 비교적 어린 평균연령, 부족한 제도와 규칙 등의 요소들이 더해져 No rule이 되었을 때 알아서 잘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각자가 하고 싶은 대로 일하게 될 수도 있다.


데일리 스크럼(Daily scrum; 애자일 업무 방법론 중의 하나로 일일회의 형식으로 팀원이 모두 참석하여 진행하는 짧은 회의)을 진행할 때의 일이다. 당시 우리 팀은 오후 시간에 데일리 스크럼을 진행했는데, 주 2회 재택근무를 병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미팅에 원격으로 참석하는 경우도 많았다. 데일리 스크럼의 특성상 모든 팀원이 30초 정도 짧게 본인의 업무를 공유하고 있었는데, 원격으로 참석한 한 팀원이 본인 차례에 마이크를 켜자 갑자기 또렷한 잡음이 들리는 것이 아닌가.


"이번 정류장은 사당, 사당입니다. 내리실 문은..."


지하철로 출근하는 중에 이어폰을 끼고 열차 안에서 회의에 참석한 것이었다. 순간 여러 생각이 스쳤다. '어차피 출근 시간으로 체크하지 않으니 이동 중에 참석하는 것을 인정해 줘야 하나? 아니, 그런데 대중교통 안에서 회의에 집중이 되나? 아무리 짧은 회의라지만 회의를 진중하게 생각해야지... 가만, 스타트업은 이런 것쯤 익스큐즈 하는 분위기인가?' 한 팀원의 실수 때문에 데일리 스크럼을 멈추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그 당시는 별다른 언급 없이 지나갔다. 말 그대로 실수라고 생각해서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거란 막연한 기대로 넘기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몇 주 후 또 다른 팀원이 똑같은 실수를 하고 만다(!). 그 때가 돼서야 알았다. 그들은 이게 잘못된 것이라는 자각이 없었던 것이다(혹은 이 정도는 봐줄 수 있지라고 생각했을지도). 비로소 나는 출퇴근 이동 시간은 업무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회의는 이동 시간을 피해 조용한 곳에서 참석해달라는 내 기준에서 너무나 당연한 공지를 해야만 했다.


스타트업에 다니다 보면 이런 일이 많다. 내가 생각한 상식이 붕괴되는 일 말이다. 리더 혹은 회사가 생각하는 '당연한 일'이 생각보다 모든 구성원들에게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 당연한 것도 한 번 더 공지하고, '왜?'라는 질문이 나오면 이게 왜 지켜야 할 내용인지 설명하고 가르치며 서로의 상식선을 맞추어야 한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No rule의 결과로 걷잡을 수없이 회사의 기강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No rule만이 해답이 아니라는 인정

어떤 일의 정답이 한 개인 경우는 수학이나 논리 문제처럼 명백한 답이 있는 경우다. 넷플릭스에서 No rule이 통했다고 해서 우리 회사에도 잘 맞을 것이라는 보장은 당연히 없다. C 레벨이 어떤 단어에 꽂혀 매몰되면 회사의 모든 구성원은 따를 수밖에 없다. 스타트업에서의 업무방식이 철마다 유행 따라가듯 바뀌는 이유는 대부분 이 때문이다.


이런 일이 꼭 스타트업에만 있지는 않다. 큰 회사를 다녔던 시절, 새로 부임한 본부장님이 원하는 방식은 삼성의 '원 페이퍼(One paper; 모든 보고 문서를 한 장으로 요약하는 것)'였다. 당연히 얼마 안 가서 변경되었다. 한 페이지에 모든 업무 내용을 담기에는, 당시에 우리가 하던 프로젝트가 너무 초기 레벨이라 내용이 방대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떤 특정한 방식을 맹목적으로 쫓기보다는, 회사와 제품의 생애 주기에 맞게 벤치마킹할 문화를 정하고 조금씩 변경하면서 합을 맞추는 쪽이 실패할 확률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스타트업의 장점은 자유롭고 수평적인 조직문화이기에 구성원의 창의성을 저해하거나 업무를 비효율적으로 만드는 겉치레식 제도와 규칙은 없어야 맞다. 하지만 제도와 규칙은 대상을 구속하기 위함이 아니라 모두에게 공평의 가치를 보장하기 위해 존재하기도 한다. 특히 맨땅에 헤딩 중인 초기 스타트업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도 집약적인 제도와 규칙이 필요하다. 가짓수는 줄이되, 반드시 지켜야 하는 작지만 강한 약속 말이다. 이러한 약속이 모두를 위한 투명한 울타리가 되어줄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외쳐본다.

Rule? Hell yes, ple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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