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나리꽃과 벚꽃이 피었다 지고 철쭉꽃이 피었다 질 무렵에 아카시아는 그리움의 향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제 어떤 꽃이 피어나려나…. 그렇게 사라진 것들만을 생각하며 무기력하게 봄의 계절을 지나왔다.
살아가기 위해 붙잡듯 노력했던 일들이 져버리고, 상처를 품고 나를 부정하게 되는 시간 속에서 갇혀 있었다. 한 번 크게 상처받은 마음은 치유될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마음과 몸은 연결되어 있다. 마음이 아프면 몸은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죽은 사람처럼 자꾸 눈을 감게 된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특히나 나를 더욱 부정하게 되고 나를 탓하게 된다. 이제 자신을 부정하는 건 그만하자고 이제 앞으로 나아가자고 수 없이 다짐해오며 마음을 단단히 했던 지난날들은 내게 없었던 일처럼 마음은 다시 여린 살이 되어 있었다.
'먹고 사는 일이 다 그렇지.' 알고 있다. 먹고 사는 일은 다 그런 거라고. 사람이 사람에게 상처를 내는 일도 다 그런 거라고. 우리는 애써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모두가 알고 있는 다 그런 일들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오른쪽과 왼쪽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싸우는 곳이 너무 화가 나서 사람을 미워하다 미워하다 결국 나 자신마저 사람이라는 것을 미워하게 된다. 이 세상에 보이지 않는 피들이 얼마나 많을까. 지금 걷고 있는 거리에도 얼마나 많은 피가 일렁이고 있을까. 이렇게 생각해 보면 우린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헤엄치고 있는 병든 물고기 같다고 생각했다.
결국 먹고 사는 일이 다 그런 일들을 등지고 나는 그 무엇의 방향도 아닌 곳으로 가고 있다. 어느 방향이라고 해야 할지 아직 나 자신도 잘 모르는 곳에 있다. 잘못된 길일까 봐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깊은 잠에만 들기를 바랐다. 그렇게 누워서 지내는 동안 겨우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어떤 길이였어도 언제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는 것. 자신이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쉽게 알아가면서, 왜 노력한 것들은 깊은 구덩이를 파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일까. 이 순간에도 노력하고 있는 것일 텐데.
낮인지 밤인지도 상관없는 날들을 보내다 커튼 사이 푸르스름한 빛이 번질 때쯤 어느 날 몸을 일으켰다. 이제는 알 것 같은 마음이 들어 창문을 확인했는데 새벽의 풍경이 나를 차분히 다독거렸다. 천천히 가도 된다는 듯이. 그렇게 새벽이 끝날 때까지 적막 속에서 나 자신과 많은 대화를 했다. 햇빛이 방안 가득 비추며 들어올 때 뒤집어 놓은 거울을 다시 뒤집어 나를 바라보았다.
'이젠 나 자신에게 좀 더 솔직해지고 싶다. 누군가 주는 상처로 인해 내 꿈이 맞는가 틀린가를 고민하는 나 자신이 아닌, 진심으로 내가 무엇을 원하며 살고 싶은지 이제는 나에게 귀를 기울이고 싶다. 가는 길에 불쑥 나타나 방향을 가르는 사람들과 더는 맞서지 않을 것이다. 나 자신의 한계를 정하는 일도 하지 않기를 바라며 가끔 뒤를 돌아보거나 지나갔던 일들에 문득 화가 찾아오더라도 싸우는 건 지금의 나 자신뿐이길 바랄 것이다.'
점점 선명해져 가는 얼굴을 마주하고 아침을 알리는 햇빛에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지는 꽃들과 피어나는 꽃들을 눈에 담는 동안 다정한 사람이 되는 듯한 기분이 들어 미운 마음들이 잠시 흐릿해져 갔다. 그렇게 섬세하게 풍경을 바라보면서 '꽃이 피고, 지는 일보다 소중한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봄의 계절을 지나 초여름, 장미꽃이 매혹적으로 피어났다.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라는 것을 알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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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자주 멈추고 넘어질 것을 안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써오며 긍정적이지 않은 나를 탓했지만, 이제는 그런 나조차도 나 자신이고 당연히 넘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 순간 너무 긍정적이지도 너무 부정적이지도 않은 마음의 상태가 되었다. 긍정적인 것도 부정적인 것도 결국 흘러가는 것들이니까. 당장 어떻게 될지 나의 방식대로 먹고 살아갈 수 있을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나는 정답은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오늘을 살아서 창가의 빛을 보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며 지금, 해야 할 일을 한다. 나만의 속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