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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신 Sep 12. 2022

오렌지 방구

나이와 이름도 모르지만 묵묵히 오렌지 방구 게임을 잘 했던 그 아이



 중3 겨울, 싱가포르 교회 수련회에 참여했다. 그때 다른 교회 친구 두 명도 함께 가게 되었다. 그 친구 중 한 명은 나랑 성별과 나이가 같은 M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나이도 이름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의 이름을 불러 본 적 없고 그도 내 이름을 부른 기억이 없다. 나이도 이름도 모르고 사소한 대화조차 나눠보지 않는 그를 나는 ‘오렌지 방구’라고 부른다. 오렌지 방구의 첫인상은 무채색과 같았다. 조용하고 외적인 모습이 튀지 않아 처음 봤지만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쉽게 말 붙일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인천 공항에서 새벽 비행기를 타야 했기에 출발하기 하루 전날 미리 출발했다. 부산에서 인천까지 차로 이동했기에 시간이 걸렸다. 기나긴 이동 시간이 지루해 우리는 차 안에서 팅팅탱탱 프라이팬 놀이, 아이엠그라운드, 호빵찐빵대빵, 369 등 온갖 게임을 했다. 여러 게임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임은 ‘오렌지 방구’다. 

 오렌지 방구 게임은 두 손을 모아 ‘오렌지 방구 누가 꼈나.’를 저음으로 부른 후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 한 사람을 지목해 ‘네가 꼈지.’를 외친다. 그럼 지목당한 사람이 ‘뿡-뿡-뿡- 아↘이-냄↘새-’ 후 다음 사람을 지목한다. 이 게임의 핵심은 웃음기 없는 얼굴이다. 조금이라도 웃음이 새어 나가거나 입꼬리가 씰룩거려도 진다. 대신 표정을 우스꽝스럽게 짓는 건 허용된다. 모두가 정색하고 저음으로 ‘오-렌지 방-구 누가 꼈나- 네가 꼈지. 뿡-뿡-뿡-아↘이-냄↘새-’를 외치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사이비 종교 의식을 치르는 것 같기도 하다. 이 게임만 시작하면 평소 의식하지 않던 친구의 이목구비들이 왜 이렇게 웃긴 건지. 지금도 방귀 이야기만 나오면 꺄르르 웃지만, 그때 역시 ‘뿡-뿡-뿡’ 방귀는 웃음 지뢰였다.


 게임이 시작되었다. 웃음을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모두의 입꼬리가 씰룩씰룩 하고 있었지만 오렌지 방구는 힘든 기색 없이 평안히 게임에 임하고 있었다. 아, 큰일 났다. 평안해 보이는 오렌지 방구의 표정과 절도 있는 손동작이 너무 웃겨 내 목소리는 떨리고, 겨울인데도 땀이 났다. 강적이다. 조금이라도 웃음이 새는 순간 파-하하하 하고 터트릴 것 같아 시선을 급히 돌렸다. 그러다 오렌지 방구가 지목 당했고 그는 건조한 목소리로 ‘뿡-뿡-뿡’ 외치는데 그걸 참아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자지러지게 웃는데 그는 평안했다. 웃기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웃긴 오렌지 방구. 나는 이날 눈물 콧물 땀을 뺏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싱가포르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내 생애 첫 비행기였다. 6시 간 동안 하늘을 날아 드디어 싱가포르 공항에 착륙할 때 귀가 찢어질 듯이 아팠다. 모두가 귀 통증을 호소하는데 오렌지 방구는 무덤덤했다. 어떻게 모든 일에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틀 정도 관광하고 삼 일째부터 교회 수련회에 참가했다. 그날 저녁, 한국에서 온 우리를 환영하기 위해 작은 파티가 열렸다. 교회 입구 쪽에 작은 피아노 한 대가 있었다. 오렌지 방구는 피아노 건반에 손을 얹더니 근사한 연주를 했다 . 연주가 끝나자 모두가 박수를 치며 앵콜을 외쳤다. 그는 수줍은 미소를 띠더니 다른 또 다른 곡을 연주했다. 피아노도 잘 치는 오렌지 방구.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말수도 없고 숫기도 없다 생각한 오렌지 방구는 갑자기 태권도 시범을 보였다. 싱가폴 사람들은 그의 절도 있는 동작과 흐트러짐 없는 발차기에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이외에도 농구 슛을 잘 넣었고 물총싸움 할 때 몸짓이 빠르고 상대를 향해 흐트러짐 없이 물을 쐈다. 첫 인상은 조용하고 숫기 없는 오렌지 방구였는데 알고 보니 다재다능했다. 이정도 재능이라면 무리에서 분위기를 주도하거나 잘난 척 할 법도 한데 평소에는 벽처럼 조용하다 상황에 맞게 자신의 재능을 보이는 그가 멋있었다. 귄위주의와 권위가 다르듯 잘난 척과 잘난 사람은 다르다. 자신의 잘남을 큰 목소리로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주변에서 자연스레 인정하게 된다. 그때부터 나는 오렌지 방구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첫 인상은 무채색 같지만 알아갈수록 색이 다양한 사람. 많이 말하기 보다 많이 듣는 것이 멋스럽다는 것을 배웠다. 나는 재능은커녕 잘하는 것조차 없지만 오렌지 방구 게임에 성실하게 임해 웃겼던 오렌지 방구처럼 진지하지만 유쾌한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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