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에 만났던 나의 친구에 대하여
돈은 꼭 갚겠다. 안 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
이 구절이 너무 좋아서, 나는 책상 위 작은 칠판에 써두었다. 다음날, 대학시절 동안 나를 거두어주신 고모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셨다. 안나야, 혹시 너 어디서 빚졌니?
『반 고흐, 영혼의 편지』는 이미 여러 번 재판되어 나온 책이다. 못본 새 표지 디자인도 아주 예뻐졌다. 내가 처음 이 책을 구입했을 땐 고전문학처럼 맨질한 종이 표지에 딱딱한 글씨체로 쓰여진 제목이 전부였다. 나는 이 책을 고등학교 시절 친하게 지냈던 언니로부터 알게 되었다. 안나야. 너 혹시 이 책 읽어봤니? 반 고흐가 동생에게 쓴 편지래. 너무 좋더라. 나는 당시 그 언니의 모든 것이 좋았으므로 당연히 책을 냉큼 사서 읽었다. 우리는 음악 취향도 꽤 비슷했는데 책 취향도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나는 밑줄을 그어가며 마음에 드는 구절을 암기하거나 다이어리에 따라적곤 했다.
언니는 내가 매번 어떤 음악을 듣는지 물어봤다. 내 음악 취향이 너무나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때의 푸른 새벽이라든지 에피톤 프로젝트, 막시밀리안 헤커와 킹 오브 컨비니언스의 노래를 주로 들었다. 그때의 나는 멋지지 않으면 가차없었다.
언니를 처음 알게 된 건 인터넷을 통해서였다. 그때엔 인터넷으로 만나 친해져 직접 만나서 밥을 먹고 공통관심사에 대해 대화하는 것이 꽤 건전한 취미 중 하나였다. 경남 진주에 살던 나는 인터넷으로 만나 친해진 언니들을 만나러 서울을 가기도 했고, 대학 때문에 거처를 서울로 옮긴 후에는 꽤 자주 만남을 가졌다. 우리는 만나면 함께 밥을 먹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달콤한 케이크 같은 것을 먹은 후 헤어졌다. 그때엔 카카오톡이 없었기 때문에 MSN메신저로 수다를 떨었다. 나에게 고흐의 편지를 소개시켜준 언니가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떠난 후, 나는 다른 언니와 교류를 하기 시작했는데 우연찮게도 같은 대학에 다니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언니와 나는 아주 잘 맞았다. 전공은 달랐지만 단짝처럼 붙어다녔기 때문에 우리 과 동기들도 그 언니를 잘 알았다. 언니는 착하고 재미있었다. 나에게는 없는 유머를 가지고 있었고 글을 잘 썼다. 우리는 일주일 중 거의 7일을 붙어다녔다. 나는 언니가 너무 좋았고 함께하는 그 모든 시간이 유의미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나는 대학원에 다니며 1년은 학교 갤러리에서 조교로 일했고, 또 남은 1년은 수업으로 알게된 선생님의 출판사를 들락거리며 책 편집인을 꿈꿨다. 그 후 2년 동안 논문을 썼는데, 그러는 동안 언니는 졸업을 하고 방송작가가 되기 위해 아카데미를 다니기 시작했으며 그 사이 우리는 서로에게 아주 느린 속도로 소원해졌다. 서로 알아채지 못할 만큼 아주 느리게. 아마 내 기억이 맞다면 막바지 논문을 쓰던 언젠가의 가을 즈음 연락을 완전히 끊었던 것 같다. 아마 편지와 쪽지들을 모아둔 상자 안에는 언니가 적어준 편지들이 꽤 많을 거다. 우리는 20대 초중반, 반짝이던 시간들 중 아주 많은 것을 공유했고 그때만 가질 수 있었던 감성들, 취향들을 공유했다. 거기엔 그때 함께 좋아했던 아이돌도 있었고, 글을 나눠 썼던 페이지들이 있고, 함께 만들었던 홈페이지와 함께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함께 본 영화, 함께 먹었던 음식들과 함께 갔던 여행지들, 그런 것들이 있었다.
반 고흐가 죽을 때까지 동생 테오와 주고받은 편지의 개수는 무려 600통이 넘는다. 그 많은 편지 속에는 그림에 대한 열정과 집착, 지독한 가난과 고득, 삶에 대한 애환들이 담겨 있을테고 그의 유일한 친구이자 남동생이었던 테오를 향한 애정 또한 담겨있을 테다.
내가 언니와 함께 보냈던 시간들을 숫자로 계산한다면, 글쎄, 얼마나 될까. 그 시간 안에 우리의 기억과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들과 웃음, 그러면서 쌓인 서로를 향한 실망이나 무력감 역시 있을 것이고. 나는 나의 소중했던 친구를 이제는 과거의 어딘가로 보내주어야 함을 인정해야 한다. 잘 지내고 있는지, 건강은 어떠한지, 언니도 나처럼 가끔은 우리가 함께 즐겼던 영화나 책, 음악을 찾는지.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막상 보게 된다면 나는 그저 다시 볼 수 있게 되어 다행이야, 라고만 얘기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서.
누군가와의 기억은 가끔 참 너무나도 진하다. 시간도 희석하질 못한다.
돈은 꼭 갚겠다. 안 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
이걸 책상 위 칠판에 써놨는데 고모가 나한테 심각한 얼굴로 그러시는 거야. '안나, 어디 빚졌어?'라고. 그렇게 말했던 언젠가의 어린 나와, 그 얘기를 들으며 크게 소리내어 웃던 언니.
그런 것들이 생각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