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 먼 어느 나라에서 맡은 꽃의 향 - 엄마의 냄새
거의 십 년도 전 즈음, 친구와 터키 여행을 세웠다. 왜 하필 여행지를 터키로 결정했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때의 난 취업을 생각하고 싶지 않아 진학했던 대학원 과정을 수료한 직후였고, 자유의 몸이 되었음을 축하하기 위하여(하지만 논문을 쓰기 시작하면서 이건 모두 착각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된다.) 10년지기 친구와 함께 20여 일의 터키 여행을 계획했다.
이스타불에서 시작해 카파도키아, 파묵칼레를 거쳐 지중해인 안탈랴를 지나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1월의 터키는 몹시 추웠지만 이십대 초반의 패기어린 열정은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었다. 우리는 터키의 고속버스를 주요 교통수단을 삼아 도시와 도시 사이를 이동했다.
터키엔 유명한 것이 참 많다. 이슬람과 가톨릭이 혼재되어있는 종교적 역사를 알 수 있는 수많은 박물관과 유적지, 양탄자와 향신료가 가득한 시장들, 금방이라도 요정이 튀어나올 것 같은 카파도키아 괴레메 골짜기들, 파묵칼레의 황홀한 전경과 열기구, 글라이더를 타볼 수 있는 익스트림 스포츠까지. 거기다가 먹을 건 또 어찌나 많은지. 나는 아직도 이스탄불 어느 시가지에서 맛봤던 고등어 케밥의 맛을 잊지 못하고 쫀득한 아이스크림과 식당 테이블마다 가득 쌓여있던 고소한 에크멕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역시 먹는 게 남는 거라고 다양하게도 먹었었다.
터키의 북서부에 위치한 작은 마을인 사프란볼루는 이름에서도 느껴지듯 이 지역은 오래된 사프란 꽃의 군락지라고 한다. 거기에서 우리는 사프란 로쿰(터키쉬딜라이트라고 부르는 디저트)을 먹으며 감탄했고 친절한 마을 사람들이 대접했던 따뜻한 애플티와 차이티를 마시며 동네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마을에는 관광객들을 위한 작은 상점들이 있는데 그 중 한 곳에서 직접 손으로 뜬 털장갑과 나자르본주(재앙을 물리쳐준다는 의미가 있는 푸른 유리알로 터키의 대표적인 기념품)를 엮은 조그만 모빌, 그리고 사프란 향이 나는 스프레이를 샀다. 스프레이를 한 번 뿌리면 아주 진한 꽃 향기가 난다. 코를 바로 들이대면 매울 정도로 진한 향이었다.
나는 그 스프레이를 터키 여행 기간 동안 두 세병 정도 샀었는데 그 중 한 병은 여밈이 단단하지 않아 병 안에 든 내용물이 흘러나와 곤란했던 적도 있었다. 한겨울에 맡는 노란 사프란 꽃 향은 아주 강렬했고, 나는 사프란볼루를 떠나 카파도키아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엄마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나의 엄마는 타고나길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정'이다. 무엇이든 해야한다. 그리고 그건 대개 일이다. 엄마는 내가 중학교를 다닐 무렵부터 식당을 운영했다. 공장에서 일하는 인부들이 주로 찾는 기사식당이었는데, 엄마는 거기에서 백반을 만들고 김치찌개를 끓였다. 그 식당 일을 했던 5년 여의 시간이 우리 가족에게는 썩 유쾌하지는 않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고 얼마 뒤 엄마는 그 식당을 그만 두었고, 그 다음에는 식당의 종업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십여 년 동안 서너 군데의 식당을 옮겨다니며 엄마는 일을 했다. 불 앞에서 음식을 요리하는 일이란 쉽지 않았고 엄마의 손과 발은 성한 데 없었다.
한 달에 한 번, 집에 내려갈 때마다 나는 작은 집의 안방에서 아빠와 엄마와 함께 잠에 든다. 보통 내가 가장 늦게 잠자리에 들기 때문에 거실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다 불 꺼진 안방에 들어가면 몹시 조용한 가운데 두 분의 숨소리만 들린다. 마치 외부 세계와 단절이 된 것마냥 그렇다. 그럼 나는 내 몫의 이부자리로 몸을 밀어넣고 가만히 들리는 숨소리를 듣는다. 이따금 엄마의 갈라진 손 끝에선 아주 미약한 생선 비린내 같은 것이 날 때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본가로부터 무려 8,000킬로미터 가까이 떨어진 터키의 어느 한 도로 위에서 엄마를 떠올렸다. 더 정확히는 엄마의 냄새다.
엄마와 딸의 애틋한 관계 - 라고 칭하기에는 애매했다. 나는 엄마를 사랑하지만 한편으로는 엄마가 조금 불편하고 또 조금은 어려웠다. 어릴 때는 엄마가 어려운 이유가 나와는 다르기 때문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엄마는 나와 달리 외향적이고 손재주가 아주 좋았다. 나와는 달랐다.
캄캄하고 텅 빈 도로 위를 달리던 심야버스의 온도를 기억한다. 아주 추운 날씨였고 나와 친구는 우리 몸집만한 캐리어를 아래쪽 차고에 우겨넣은 후 외투를 담요삼아 자다깨다를 반복했다. 어스름한 새벽빛조차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로 흐리고 추운, 완연한 겨울이었다. 나는 서비스 디저트로 제공된 조그만 비스켓과 물수건을 챙겨 가방에 넣은 후 건조한 눈을 쉴새 없이 깜빡이며 이따금, 사프란볼루에서 구입한 샤프란 스프레이의 뚜껑을 여닫았다. 그럴 때마다 희미하게 노란 꽃 향이 났다.
3주 간의 여행은 나에게 아주 많은 것을 남겼다. 필름카메라로 서툴게 촬영한 터키의 풍경들과 이래저래 구입한 기념품들, 남은 동전들과 도난당한 휴대폰과 맞바꾼 안탈랴 경찰들과의 추억까지. 집으로 돌아와 짐을 하나씩 풀면서 샤프란 스프레이를 꺼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터키에서 맡았던 것과는 다른 향이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마 그 안에 들어있던 알코올을 포함한 첨가물에 변질이 있었거나 또 혹은 여행의 향취가 더이상 섞여있지 않아서 일지도 몰랐다. 그저 코 끝을 찌르는 알싸한 향기는 약간의 두통을 남긴 채 사라졌다.
여행을 다녀온지 10여 년이 훌쩍 넘은 지금, 사실 샤프란 스프레이의 향이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오히려 여행 중 고등어케밥을 두 번밖에 먹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만 철철 넘칠 뿐이다(진짜진짜 맛있었다). 더군다나 그때 구입한 두 병의 스프레이 모두 반도 쓰지 못하고 처분했다. 쓸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서울, 조그만 원룸에서 맡는 샤프란의 향에선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그 어떤 어릴 적 기억도 남아있지 않았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나는 어느 문화예술 관련 기관에 인턴으로 취업했고 약 7개월 동안 혹독한 사회생활을 경험했다. 여행의 흥취따위 제대로 느낄 여력이 없었다.
지금도 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기억이 많이 휘발해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때의 버스 안 풍경과 차가운 공기, 흐릿하게 남아있는 향기 같은 것들.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문득 떠오르던 엄마, 엄마의 냄새.
내가 엄마를 어려워했던 건 엄마와 너무 닮아서였을지도 모른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극도로 힘들어 하고, 가리는 음식이 많고, 고집이 세며, 사람들로 인한 상처에 취약하다는 것. 그런 점들이 꼭 거울 같아서 나는 엄마 안의 내 모습을 발견하고 다가가는 것을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닮았다는 것. 그건 어쩌면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고 다짐했던 그 언젠가의 철 없던 내 모습일지도 모르고. 그리고 - 감정 표현에 서투른 딸을 꼭 안아주기 위해 내민 엄마의 손으로부터 머나먼 나라의 노란 꽃 향기를 느끼는 지금의 나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