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색

그래요, 사랑이었어요 <10>

by 김동하

어릴 적 한 마을에 사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 친구 중에서도 유독 한 친구를 좋아했는데 특별한 이유 없이 마냥 좋아했다. 과자가 생기면 나눠 먹고 하굣길에는 내 자전거에 태워 집까지 태워다 주고는 했다. 그런데 왜일까. 그 친구를 떠올리면 초록색이 연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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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친구의 집의 마당에는 수목원처럼 커다란 나무들이 많았다. 일반적인 정원수가 아니라 산에서 자랄 것처럼 커다란 나무들이었다. 집이 커다란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그 친구를 좋아하면서도 좀처럼 그 집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 커다란 나무들에 압도됐다고나 할까. 조금 과장하자면 나 같은 건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은 성역처럼 여겨졌다. 그 친구는 뭐든지 잘했다. 공부도 운동도 잘했고 남자애이면서 얼굴도 예쁘장했다. 나보다 키가 조금 작다는 사실 하나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방면에서 나보다 뛰어났다. 나중에 알고 더 충격을 받은 건 그런 그 친구의 형은 차원이 다른 수재라는 사실이었다.


당시에는 질투심 같은 게 없었다. 그저 궁금했다. 어떻게 형제가 다 뛰어날까. 그 비밀이 친구의 집에 감춰져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친구를 자전거로 태워다 줄 때마다 커다란 나무들을 올려다보고는 왔다.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친구의 집은 여느 평범한 시골집과 같아 보였고 하나 차이라면 나뭇잎들 사이로 쏟아진 햇빛이 친구의 집 외벽에서 출렁인다는 정도뿐이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비밀은 매미 소리가 들리는 저 나무들이라고.


나는 원룸과 오피스텔을 전전하다 현재는 아파트에 산다. 생각해 보면 대학 기숙사에서 지낼 때도 화초를 사서 키우고는 했다. 늘 화초 하나는 키웠던 것 같다. 그런데 오래 키운 적은 없다. 농부인 부모를 두었으니 식물 키우기에 분명 재능이 있을 거라는, 대충 키워도 잘 자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화근이었던 것 같다. 작물은 대부분 한해살이가 아닌가. 그래서일까. 내가 키운 화초들은 대개 한 해를 넘기지 못하고 시들었다.


아파트에 살림을 차리고 또다시 화초를 키우기 시작했다. 역시나 똥손인 걸까. 가만히 두어도 잘만 자란다는 다육이마저 살아남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가만히 두지 않아서 그런 것도 같다. 쑥쑥 자라는 걸 보는 게 즐거운 나머지 물을 자주 주었으니까.


기르던 화초가 시들면 마음이 좋지 않다. 시든 다육이를 버리지 못하고 물컹해지다 딱딱하게 마를 때 지켜보고 나서야 치웠다. 그런 내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다육이가 시들기 전에 떨어졌던 잎들을 따로 모아두었는데 그 절단면에서 뿌리가 자라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게 내 다육이는 후손을 남겼다.



사진 속 다육이들은 그 후손에 후손이다. 놀라운 일이다. 이런 식이라면 최소한 유전적으로는 최초의 다육이가 계속해서 생명을 이어오고 있는 셈이다. 가까이 두고 보고 싶은 마음에 서재에 두었었는데 그건 내 욕심인 것 같다. 햇빛을 좋아하는 다육이를 결국 빨래 너는 공간으로만 사용하는 베란다로 옮겼다.

나날이 인색해지는 나를 보고 화들짝 놀라곤 하는데 이 작은 식물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여전히 어릴 적 친구의 집에서 본 커다란 나무의 비밀을 밝혀내진 못했다. 상관없다. 내게 이 작은 초록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남아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