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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신지 Nov 22. 2017

그 놈의 빅 픽처,나란 놈은 스몰 픽처

인생에서 꼭 대단한 무언가를 찾아 헤매야만 할까?


여러분은 5년 뒤, 10년 뒤를 그려본 적 있습니까?



스무 살 무렵, 수업 중에 교수님이 그런 말을 했다. 가을볕에 맥없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우리가 한심했는지, 안경 너머로 강의실을 굽어보는 눈빛이 찌릿했다. 교수님은 이어 말했다. 


흔히 사람들은 근시안적으로 다음 주 계획, 다음 달 계획, 내년 계획 정도나 열심히 세우지만, 사실 성공하려면 5년 뒤, 10년 뒤를 내다보며 인생의 큰 그림을 그려야 하는 법이라고. 그렇게 먼 미래를 그려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10년 뒤에 정말 크게 벌어진다고. 


그땐 뭐든 아, 그렇구나… 하고 고개 끄덕이는 시기였기 때문에, 그 말을 듣자 왠지 모를 초조함이 밀려왔다. 하여 근시안적으로 수업을 듣는 대신, 당장 노트에 미래 계획을 써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10년 뒤라…. 10년 뒤…. 아니, 일단 5년부터 시작하자. 5년 뒤에 나는…. 노트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애꿎은 동그라미만 그릴 뿐, 도무지 무엇을 계획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는데 5년 뒤를 짐작해본다는 게 가능한 건가? 계획하면 또 계획한 대로 되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나이 덧셈이 전부였다. 5년 뒤엔 스물다섯, 10년 뒤엔 서른이겠지, 그런 식으로. 그 외에 무엇을 더 그려볼 수 있었을까. 그 후로도 삶의 대목마다 책의 목차 같은 말들이 나타났다. 세상이 통째로 자기계발서가 된 것 같았다. 


인생의 큰 그림을 그려라!
네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꿈을 꾸어라!
부단한 자기계발을 통해 성장해라!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살아라!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어쩐지 내가 잘못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듣기 전까지는 멀쩡했었는데. 멀쩡한 사람을 이상하게 만든다면, 저런 말들이야말로 어딘가 이상한 게 아닐까? 의구심이 들었다. 


성장판 닫힌 지도 오랜데 언제까지 성장하라는 건지 모르겠고, 그런 식이라면 사람은 죽을 때까지 성장하다 최고의 자신으로 죽겠네. 그것 참 근사하네…. 꼬인 채로 좀 생각해보자니, 어른들이 실은 세상에 없는 것을 자꾸 있다고 하는 게 아닐까 싶어졌다. 말이야 멋지고 거창하지만, ‘인생을 걸고 완성할 큰 그림’이라는 게 정말 있는 걸까? 


물론 빅 픽처가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에 나는 너무 야망 없는 인간이다. 야망이라는 말만 들어도 피곤해진다. 삶을 전략적으로 보고 원대한 목표와 체계적 계획을 세우는 사람을 보면, 아 대단하다… 여기면서 돗자리에 눕고 싶어지는 게 나다. 경쟁은 질색이라 술자리 게임이나 내기도 싫어한다. 이기려고 눈치 보고 졌다고 아까워하기보다 그냥 별것 아닌 얘기나 나누고 싶다. 바쁜 것도 별로다. 앉아서 일하는데도 마음이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숨 찬 기분이 드는 게 싫다. 도전도 안 좋아한다. 자기 한계 극복, 이란 말은 더더욱. 태어나 사는 것도 고단한데 뭘 또 그렇게까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빅 픽처라니, 그런 걸 아무리 그린다 한들 삶이 계획한 대로 흘러가 줄 리 없다. 




그러다가 자기 대신 자기가 세운 목표가 삶을 살아가도록 두는 사람들을 나는 더 많이 보았다. 무엇보다 빅 픽처 이론이 생선 가시처럼 목에 걸리는 지점은, 인생의 어떤 ‘완성’을 가정한다는 것이다. 현재를 완성된 삶을 위한 어떤 단계로 보는 한, 우리는 영영 미완성의 삶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똑같은 자기계발서를 읽고, 똑같은 포털 사이트에 접속해 똑같은 메인 뉴스를 보고, 똑같은 성공병을 앓는 동안, 우리는 의심하지 않고 살아왔다. 인생은 발전돼야 하는 것이고, 자기는 계발돼야 하는 거라고. 그런 세계에서 나는 늘 ‘더 노력해야 할’ 부족한 존재일 수밖에, 지금의 삶은 아직 무언가를 이루지 못한 미진한 단계일 수밖에 없다. 


빅 픽처는 인생에 큰 기대를 걸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실망하고 만다. 그럼 작은 기대를 걸고 자주 행복해지면 안 되는 걸까? 내가 궁금한 것은 이런 것이다. 


목표가 없는 삶은 게으른 삶인가?
꿈이 없는 사람은 ‘진정한’ 삶을 살고 있지 못한 걸까?
인생에서 대단한 무언가를 찾아 헤매야만 할까?

애초에 무를 썰려고 칼을 뽑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왜 자꾸 무‘라도’ 썰라고 하는 건지. 



나는 끊임없이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노력하고 싶지 않다. 보이지 않는 큰 그림을 그리느라 현재를 희생하고 싶지도 않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으면 사람은 울적해진다, 라는 건 내 얘기가 아니고 실제로 그런 연구 결과가 있다. 미국에서 ‘트랙 유어 해피니스’라는 어플로 2250명의 성인에게 무작위 시점에 현재 자신의 기분이 어떤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일을 하는지 적어보라고 했다. 


그 결과 지금 하는 일과 생각이 일치하는 사람이 가장 행복했다. 즉, 지금 하는 일과는 다른 긍정적인 무언가를 떠올린 사람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는 것. 그 연구 결과는 말한다. 멀리 보는 대신 발밑의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질을 높인다고.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하면, 인생은 너무 고통이다. 삶의 목표 같은 걸 세워버리면 우리는 목표는 과대평가하고 매일의 일상은 과소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보이지도 않는 하나의 빅 픽처보다 매일 눈앞에 보이는 스몰 픽처를 백 개 천 개 그리고 싶다. 오늘은 큰 그림의 일부가 아니라, 그냥 오늘이니까. 인생에 무언가 ‘더 중요한’ 것이 있고, 지금 내 삶이 미진한 거라고 여기고 싶지 않다. 지금보다 더 나아져야 그게 진정한 나라고 여기고 싶지도 않다. 


그 와중에 이 야망의 시대를 건너기 위한 아주 단순한 방법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지금을 호시절이라 여기는 것이다. 호시절이란 무엇인가. 삶의 낙이 있는 게 호시절이다. 야망 없는 이들이 그럭저럭 살아가기 위해선 가끔 삶의 의욕이 샘솟는 순간이 필요하다. 내게 ‘열심히’란, 어느 여름날 옥상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다가 갑자기 삶에 대한 의지가 불끈 솟는 그런 정도다. 



“이렇게 맛있는 맥주를 마시려면 역시 열심히 일해야겠어!” 그 정도의 열심히가 좋다. 그 정도의 열심히는 실천도 할 수 있고 기분도 좋다. “이 낙에 산다” 하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내겐 그게 스몰 픽처 같다. 별것 아닌 일로 정체불명의 삶의 의욕이 샘솟는 것. 그렇게 살아선 안 된다고 말하는 이들은 대체로 야망가였다. 자, 그럼 각자의 길을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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