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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신지 Nov 06. 2017

행복이 무슨 숙제도 아닌데



왜 이젠 주위에 행복한 얘기를 하는 사람이 없을까요?



오랜만에 만난 후배가 한창 근황 토크를 하다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근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도무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삶에 대한 것들이었다. 회사 상사의 비정상적인 업무 지시, 밤 10시만 되면 청소기를 돌리는 윗집 남자, 그나마 지키고 있던 삶의 질마저 뚝뚝 떨어지게 만드는 미세먼지, 전 남친 프사에 걸린 모바일 청첩장, 출근길에 지뢰처럼 깔려 있는 은행…. 


취업하기 전엔 취업이, 취업하게 된 뒤엔 또 그렇게 애써 얻은 일자리가 우리를 힘들게 한다. 가족은 그저 가장 가까운 타인일 뿐이고, 주말이 돌아와도 무엇을 해야 즐거울지 모르겠고, 혼자 천장의 무늬를 세는 어느 밤엔 삶이 다 막막해지는 순간도 온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만나기만 하면 끊임없이 불행에 대해서만 털어놓는다. 


며칠 전 만난 친구와도 비슷한 얘기를 했던 참이었다. 언제부터 우리가 이런 얘기만 하게 되었지? 왜 더 이상 좋은 것들—몇 년 뒤에 하고 싶은 일, 며칠이 지나도록 마음에 남아 있는 근사한 풍경, 오래 품어온 꿈이나 희망 같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게 되었을까. 이십 대의 우리는 삶이 더 나아질 거라 믿었는데, 삼십 대의 우리는 다만 삶이 더 나빠지지 않기만을 바라게 되었다.



스무 살의 우리는 다가올 시간을 기꺼이 기다릴 수 있었다.


‘아직’ 아무것도 아니었으므로, ‘언젠가’ 무엇이든 될 것 같았다. 내가 번 돈으로 집을 꾸밀 수 있게 되고, 가끔 기분 내며 좋은 것을 사 먹고, 휴가란 걸 써서 휴양지 해변에 누워도 보고…. 그땐 지금 보다 현명해진 내가 지금보다 멋진 삶을 살겠지. 그렇게만 생각했던 시절, 우리는 끊임없이 얘기했다. 


언젠가 내 방에 놓을 책상의 생김새와 색깔에 대해, 먹어보고 싶은 음식들에 대해, 가보고 싶은 도시와 해변들에 대해. 오늘 본 영화의 잊지 못할 마지막 장면과 새로 산 책에 밑줄 그은 구절에 대해. 그렇게 떠들고도 아직 할 얘기가 남아 문 닫은 가게 앞에 서서 아쉬운 듯 이야기하던 날들…. 자정이 지나기 전에 오늘 나누고픈 ‘좋은 것’들을 말해야 하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멈출 줄을 몰랐다. 



그랬던 우리는 이제 겨우 시간을 내어 만나서는, 서로를 못 보는 동안 쌓인 안 좋은 얘기들만 털어놓는다. 그러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된다. 진짜 살고 싶은 삶은 따로 있는 사람들처럼 지금의 삶을 함부로 말하고 나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풍경이 다 납작해 보인다. 무슨 말을 그렇게 많이 했을까. 뭐가 좋은 얘기라고. 내가 보낸 날들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해버리고 나면, 정말이지 좋았던 일들은 하나도 없었던 것만 같았다. 



그런데 삶이란 게 정말 그런 걸까? 


요즘은 습관적인 한탄 사이로, 자꾸만 다른 생각들이 찾아온다. 어쩌면 나는 여태껏 삶을 오해했던 게 아닐까? 행복해져야 한다니, ‘행복’이 언제부터 이렇게 숙제처럼 여겨지게 되었을까? 행복해지고 싶다고 말할수록 불행해지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그런 식으론 영영 행복에 닿을 수 없는 게 아닐까. 행복 이외의 순간을 모두 불행이라 부른다면, 우리는 대체로 불행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원하던 것을 얻어도, 좋은 곳에 가고 맛있는 것을 먹어도, 그 행복감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때문에 우리는 대체로 행복이 막 지나간 자리에서, 아, 방금 그것이 행복이었지, 깨닫고 마는 것이다. 그런 순간을 제외하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간들은 그냥 살아가는 시간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면 삶은 좀 더 단순해진다. 지금 ‘행복하지 않은 상태’의 나를 탓할 필요도, 초조해할 필요도 없어지는 것이다. 


지난겨울부터 ‘1 paragraph’라는 노트를 쓰고 있다. 


한 페이지에 한 단락씩 쓰도록 만들어진 손바닥만 한 노트인데, 사람들은 주로 책 속의 인상 깊었던 구절을 적어두는 용도로 쓰는 모양이다. 거기에 금세 떠올랐다 사라진 순간들을 적는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기분 노트’ 정도 될까. 


좋은 순간의 좋은 기분은 늘 쉽게 지나가버리므로 기억해두기로 한다. 일상의 잔잔한 강물 위로 찰방, 하고 삶이 빛나는 등을 보인 순간을. 적어도 내가 기뻐지는 순간들을 알고 있으면 나 자신을 더 자주 그런 장소, 그런 순간들로 데려갈 수 있겠지 싶었다. 처음 시작할 땐 별 거 있을까, 굳이 적어둘 필요가 있나 싶어질 정도로 사소한 순간들뿐이겠지.. 가벼이 여겼는데 삶에는 생각보다 흩어져 있는 기쁨들이 많았다. 


노트를 적고서야 알 수 있었던 것들이 있다. 봄이 끝나고 여름이 시작되기 전, 그 사이의 계절을 내가 아주 좋아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여행지 숙소의 바스락거리는 이불을, 친구와 매년 같은 장소에 약속하고 찾아가는 일을, 텅 빈 관객석에 앉아 영화가 시작되길 기다리는 순간을 아주아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갑자기 좋아하게 된 것도 아니고 예전부터 좋아했던 것들이다. 그러나 단순히 적어두는 것만으로, 나는 그 순간들을 좀 더 자주 반복할 수 있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그건 여전히 모르겠지만—좋아하는 것들로 삶을 채우는 건 쉬웠다. 그렇다면, 어쩌면 그게 전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 것이다. 


주아 드 비브르(joie de vivre)


프랑스 사람들이 행복(bonheur)이란 단어 대신 일상에서 곧잘 사용하는 것으로, 우리말로 옮기면 ‘삶의 기쁨’쯤 된다고 한다. 멀리 있는 행복을 좇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일상의 기쁨들을 ‘발견’하는 것. 햇살 좋은 날 건널목에 서서 느끼는 거리의 활기, 아침마다 단골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 담벼락을 넘어와 골목에 꽃그늘을 드리우는 환한 봄꽃들. 이런 것을 시시하게 여기지 않고 ‘삶의 기쁨’이라 부르는 것. 그것이 행복보다 작다고 할 수 있을까? 


노트에 적어두면 그 기뻤던 순간의 윤곽이 점점 선명해지는 것 같다. 내가 어떤 이유로 그것들을 좋아하는지, 그렇다면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도.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 나를 기쁘게 하는 것과 힘들게 하는 것, 그 사이를 가를 수 있게 되니 잘 정리된 서랍을 가지고 사는 기분이 들었다. 필요한 것들만 제자리에 들어 있는. 사소하고 기쁜 순간, 내가 좋아하는 작은 것들로 삶을 채워야지, 그 정도가 내가 한 다짐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전부여서, 

오늘 저녁은 마주 앉은 친구에게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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