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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롬 May 23. 2017

그래, 나는 이딴 놈이다

8 마일(2002)

지미 스미스 주니어, 속칭 '래빗'(에미넴)이라 불리는 이 남자의 상황은 암울하다. 집도 없고 차도 잃었다. 가진 거라곤 몸뚱이와 옷가지를 넣은 까만 쓰레기 봉투 뿐. 당장 몸 누일 곳이 없으니 쪽팔려도 엄마가 사는 트레일러 하우스에 잠시 얹혀 지낼 수 밖에 없다.


래빗의 유일한 희망은 랩이다. 랩으로 성공해서 이 지긋지긋한 디트로이트를 탈출해야만 한다. 그러나 랩 배틀을 앞두고 화장실에서 토악질을 해대던 래 결국 무대 위에서 한 마디도 내뱉지 못한다. 비웃음 속에 처참하게 무대  온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래빗의 상황은 그가 모는 자동차와 같다. 가지고 있던 차는 전 여자친구에게 줘버렸다. 엄마가 생일선물이랍시고 던져 준 고물 자동차라도 있어 다행, 이 고철덩어리는 시동 한 번 걸기 어렵고 그 어렵게 걸린 시동마저 시도때도 없이 꺼지기 일쑤다. 시원하게 달리는 법을 모르는 이 고물이나 래빗의 현재 상황은 다를 게 없다. 래빗의 인생도 도무지 시동이 걸리지를 않는다. 좀 달리나 싶다가도 자꾸 멈춰선다. 도달해야 하는 곳이 저 멀리 있는데 한발작도 제대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런 래빗에게 새로운 기회가 다가온다. 그의 재능을 눈여겨보던 동네 친구 윙크가 레이블 관계자와 연결해 데모 제작을 돕겠다고 나선 것이다. 우연히 만난, 어딘가 달라보이는 그녀 알렉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도, 철없는 엄마의 트레일러 하우스에 들러 붙어 시종일관 신경을 긁는 젊은 애인 그렉의 꼴을 보기싫어서라도 이 기회를 잡아야만 한다. 래빗은 녹음할 곡을 만드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한다.


그러나 결국 기회도 사랑도 물거품이 되어 허무하게 사라진다. 그에게 남은 건 두 눈을 시퍼렇게 물들인 멍 뿐이다. 돌고 돌아 그가 올라선 무대는 다시 쉘터다. 원점이다. 여전히 자신을 비웃는 관중들앞에 있고 얄미운 프리월드 놈들이 상대다. 그들이 뭐라고 자신을 디스할지 뻔하다. 백인이고, 애인을 뺏겼고, 기회는 날렸다. 이 나이 먹도록 부모 집에 얹혀사는 초라한 처지다. 얻어 맞아 몰골도 말이 아니다. 래빗은 차라리 치부를 스스로 까발리기를 선택한다. 그래, 나는 이딴 놈이다. 사랑도 일도 되는 게 하나도 없다. 그러나 단 하나가 남았다. 모든 걸 잃은 채로 여기 무대에 서서 너와 이 세상을 깔 수 있는 깡.


출처 : 네이버 영화


래빗은 이 배틀에서 승리한다. 통쾌한 승리다. 그러나 그가 겪어 온 그 수많은 패배를 상쇄하기엔 너무나 작다.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 처음의 상황과 달라진 바가 없다. 그는 여전히 트레일러 하우스에 얹혀 사는 루저고, 가진 게 없어 사랑을 빼앗긴 찌질이다. 외려 더 악화됐을지도 모르겠다. 배틀은 끝났고 래빗은 야간 근무를 위해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공장으로 돌아서는 래빗의 뒷모습은 어쩐지 초라하지 않다. 여전히 그가 딛고 있는 현실은 시궁창이지만 그는 이제 무대에서 세상에 하고싶은 말을 내뱉을 수 있는 배짱이 생겼다. 누구의 도움도 바라지 않고 스스로 데모를 만들 것이다. 공장으로 향하는 것은 그를 위한 첫 걸음이다. 돈을 모아야 한다.


출처 : 네이버 영화



+

재개봉 상영관에서 오랜만에 다시 본 <8마일>. 관객이 생각보다 많았다. 역시 에미넴이다. 특이했던 건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도록 자리를 뜨는 관객이 거의 없었다는 점. 그래, lose yourself가 나오는데 어떻게 나갈 수가 있나. 나 역시 이 노래를 듣고 싶어 다시 영화관을 찾았는걸.


You better lose yourself in the music
The moment you own it, you better never let it go
You only get one shot
Do not miss your chance to blow
This opportunity comes once in a lifetime



https://www.youtube.com/watch?v=eRhEcKHU5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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