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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롬 Jul 20. 2017

놀란의 윤리와 우리의 선택

덩케르크 Dunkirk(2017)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을 기다리는 마음


현 시점에서 놀란만큼 대중적 흥행력과 작품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또다른 감독을 꼽긴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매 작품 이렇게 '빠'와 '까'가 극렬하게 논쟁을 벌이는 감독도 드물테고 말이다. <덩케르크>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굳이 말하자면 나는 '빠'에 가깝다는 사실을 미리 밝혀둔다.


내가 영화를 지금처럼 좋아하게 되기까지 이 독특한 예술 장르에 특별한 감흥을 가지게 만들어 준 몇몇 작품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인셉션>이다. <인셉션>을 놀란의 최고작으로 꼽는 사람이 많진 않은 것 같다. 대부분이 <다크나이트>를 꼽을테고 혹자는 <메멘토>를 고르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도 <인셉션>이 그의 최고작은 아니다. (최고의 오락영화라고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나에게 가장 특별한 그의 작품은 여전히 <인셉션>이다. 이 영화를 통해 경험하게 된 그 모든 감정들이 그때의 나에게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다보면 영화 그 자체보다 그 영화를 보는 내가 훨씬 중요한 어떤 작품들이 생기기 마련인데 나는 이런영화들이 많아지는 것이 가장 행복한 영화 체험이라 믿는다. 나에겐 <인셉션>을 비롯해 <엘리펀트>,<디 아워스>, <사랑은 비를 타고>,<카이로의 붉은 장미>, <파이트 클럽>,<걸어도 걸어도> 등이 그렇다.



현재까지 모든 놀란의 장편 필모그래피를 보았지만 <덩케르크>는 시작부터 그의 이전 작품들과 다른 지점에 서있다. '놀란'하면 과학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복잡하고 다층적인 플롯이 특징 아니던가. 그가 대중영화 감독으로 본격적인 사랑을 받기 시작한 것도 히어로물이나 SF블록버스터 장르였다는 것을 떠올려 본다면 새 작품의 소재로 전쟁 실화를 선택했다는 것이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다. 뛰어난 상상력으로 독창적 세계관을 구상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진 이 감독이 왜 굳이 전쟁, 게다가 실화 영화를 다루려고 하는 것일까.


1-2차 세계 대전은 영화 역사상 가장 많이 다루어진 소재 중 하나다. 20세기 인류에 닥친 가장 거대한 비극이자 엄청난 트라우마를 남긴 이 사건을 이야기 하지 않고는 20세기와 그 미래에 대해 논의하기가 불가능하다. 늘 정의와 윤리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놀란 감독에게도 이 소재는 분명 대단히 매혹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SF조차 가장 현실적인 방식으로 촬영하고자 하는 이 감독이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전쟁 실화 중 하나인 덩케르크 철수 작전을 다룬다는 것은 시작부터 대단한 한계를 설정하고 시작하는 일이다. 거짓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감독의 성미상 과장되고 드라마틱한 표현으로 실화를 포장하는 일은 적성에 맞지 않을 테니 말이다.


잘 알려져 있듯 대부분의 영화가 디지털 상영 방식으로 바뀐 현재에도 놀란은 여전히 필름 촬영을 고수하고, CG를 사용하기 보단 실제로 SF적 상황을 구현하고자 한다. 트럭을 180도 뒤집어야 하면 정말로 뒤집어서 촬영하는 식이다. 할리우드의 최전선에 있는 감독이 가장 고전적인 뚝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캐릭터가 사라진 블록버스터


<덩케르크>는 아마 배트맨 트릴로지 이후 나온 놀란의 영화 중 가장 반대중적인 작품일 것이다. 놀란의 영화가 복잡하고 어려워서 싫어할지언정 오락적인 재미가 없다고는 할 수 없었을테다. 그런데 이 영화는 정말로 오락적인 재미를 일정 부분 포기하고 들어간다. 일단 대사가 없다는 게 중요하다. 일반 대중 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은 쉴새 없이 쏟아지는 대사에 적응되어 있다. 복잡한 캐릭터와 플롯을 풀어나가는데 대사만큼 중요한 게 없기 때문이다. 대중오락영화의 대표작, 마블 어벤져스 시리즈를 예로 들어 보자. 수많은 히어로 캐릭터가 하나 빠지는 것 없이 비중있게 다뤄져야 하고 상황은 갈수록 꼬이고 복잡해져 간다.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정보가 필요하다. 캐릭터에 대한 정보, 상황에 대한 정보, 관계에 대한 정보. 그 모든 것을 효율적으로 설명해내려면 대사량이 많아질 수 밖에 없다. 아이언맨도 캡틴 아메리카도 관객인 우리를 이해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수다를 떤다. 이것이 일반적인 대중 영화가 우리와 소통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덩케르크>에서는 캐릭터가 중요하지 않다. <덩케르크>에는 시작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젊은 병사(핀 화이트헤드) 한 명이 등장한다. 분명 이 영화의 주인공이지만 그는 극 중에서 단 한차례도 이름이 불려지지 않는다. 이 인물의 이름은 중요치 않기 때문이다. 이름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이 인물의 캐릭터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그냥 일반 병사이다. 결국 그는 당시 덩케르크에서 철수한 모든 병사들을 상징하고, 더 나아가 우리 모두를 상징하는 존재인 셈이다. 특정한 이름이 붙을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덩케르크>는 또한 상황에서도 캐릭터를 제거하고 있다. 영화는 독일군을 특정하게 묘사하여 악을 상정하려 하지 않는다. 즉 놀란이 덩케르크의 실화를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것은 전쟁이란 극단적인 환경을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에 윤리적 선택의 기로를 놓는 것이다.


대중영화로서 위험한, 대사를 최소화하는 전략을 쓴 것 역시 캐릭터를 없애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대사는 인물과 상황에 대한 정보를 전달할 수 밖에 없다. 영화 속 등장하는 어떤 캐릭터가 개별적 드라마나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이 이야기는 어떤 특별한 사람의 특별한 생존기로 축소돼 버린다. 그것이 놀란이 가장 경계하는 바이다. <덩케르크>는 한 개인의 생존기가 아닌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남은 이야기다. 여기서 '우리'라는 것이 바로 영화 내내 강조하고 있는 핵심이다.


'내'가 아닌 '우리'의 생존기


그들에게 닥쳐온 것은 적의 무차별 공격이라는 상황이다. 이 상황은 복잡하게 꼬이거나 변화하지 않는다. 덕분에 <덩케르크>는 우리가 놀란 영화에서 흔히 보아온 복잡다단한 플롯보다 훨씬 단순한 이야기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놀란은 이 단순한 이야기를 세 개의 층위로 나누어 제시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리고 각각의 층위는 서로 다른 시공간을 상정한다.


1) 해변 : 병사들은 고립된 덩케르크 지역에 갇혀 탈출을 위해 절박한 일주일의 시간을 보낸다.

2) 바다 : 작은 선박을 소유하고 있는 평범한 영국 시민 도슨(마크 라이런스)은 덩케르크의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하루동안 바다로 나아간다. 

3) 하늘 : 적기와 싸우는 공군들은 연료의 한계로 단 한 시간내에 덩케르크를 폭격하는 적기를 해치우고 귀환해야 한다.


세 층위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동시에 진행되기 때문에 단선적인 시간 흐름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으나 사실 <인셉션>이나 <인터스텔라>가 그랬듯 각각의 공간에서 시간은 모두 다르게 흐르고 있다. 덕분에 영화가 진행되어 가는 과정 속에 시간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뒤섞인다. 중후반부에 이르면 이 제각각의 시공간이 서로 맞닿는 지점이 생기는데 바로 이 곳에서 <덩케르크>가 보여주고자 하는 '구원'이 발생한다.


<덩케르크>의 기적은 언제나 누군가 만났을 때, 함께 있을 때 발생한다. 역시 이름이 나오지 않는 병사인 킬리언 머피의 동선을 살펴보자. 영화의 초반부 바다에 홀로 고립되어 있는 그를 도슨이 발견하고 구출해준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는 당장 영국으로 배를 돌리라 말한다. 그러나 도슨은 우리에겐 병사들을 구해야 할 의무가 있다며 기어코 덩케르크로 전진해 간다. 그런데 뒤섞인 시간 속에 킬리언 머피가 나오는 장면이 하나 더 있다. 그는 해변에서 구명보트를 타고 탈출하는 중이다. 미처 보트에 올라타지 못한 병사들이 태워달라고 간청하지만 킬리언은 이미 보트는 꽉 찼고 다른 배가 또 올 것이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하며 떠나간다. 정리해보면 그는 동료를 버리고 덩케르크를 떠났지만 결국 바다에서 좌초되고 도슨의 도움으로 다시 배에 올라타 덩케르크로 회귀한다. 그리고 이 배에 당시 그가 버려두고 떠났던 병사들이 함께 올라타게 되어서야 비로소 그는 덩케르크를 떠나 영국으로 귀환할 수 있게 된다.



핀 화이트헤드와 해리 스타일스의 대조 역시 유사한 윤리관을 보여준다.(배역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므로 배우의 이름으로 대신한다.) 두 사람은 깁슨(아뉴린 바나드)을 두고 논쟁을 한다. 해리는 한 사람이 빠져야 모두가 살 수 있다며 그를 버리고 가자 말한다. 그러나 핀은 배에서 한 사람이 내린다고 변화가 생기진 않을 것이라며 그것은 옳지 않다고 반박한다. 누군가를 내팽겨치려 할 때 이들의 탈출은 또다시 실패한다. 그들은 결국 다 함께 살아돌아왔고 해리는 감출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러나 영화는 킬리언 머피도 해리 스타일스도 탓하지 않는다. 어쨌든 그들은 생존하여 돌아왔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도슨과 그의 아들 피터는 항해 도중 생긴 불미스러운 사고에 대해 그에게 죄책감을 지워주지 않기를 선택하며, 해리 스타일스는 시민들의 환호 속에 귀환한다. 어떤 과정이 있었든 그들은 결국 '함께' '생존하여' 돌아왔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이름이 없는 그들은 바로 우리다. 영화는 생존해 돌아온 모두를 용서한다.



놀란은 이처럼 특정한 상황에서의 윤리적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다뤄 왔는데(대표적으로 <다크나이트>), 그의 영화에 드러나는 윤리 실험적 측면을 접하다보면 다르덴 형제의 영화가 떠오르기도 한다. 극단적으로 달라보이는 두 감독 사이에 어떤 공통점을 발견하는 건 재미있는 일이다.


놀란의 선택과 우리의 선택


<덩케르크>는 매우 치밀하게 구상된 영화이다. 쓸모없는 대사와 캐릭터가 없는만큼 장면 하나하나도 그렇다. 이는 대단한 장점이지만 또한 단점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인물과 대사는 모두 어떤 상징성을 가지고 조형되어 있다. 드라마틱한 플롯에 비해 정서적 감흥이 적다는 것은 늘 놀란 영화의 단점으로 꼽혀 왔는데 이는 그가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한계로 볼 수 있다. <덩케르크>의 인물들은 개개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측면이 더 강조되어 드러난다. 이들의 행동과 대사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설정된 것이므로 지나치게 작위적인 느낌을 주기도 하며, 이는 분명 영화적 감흥을 반감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감동적인 것은 <덩케르크>가 그들이 아닌 우리의 이야기임을 계속해서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는 이름 없는 그 병사들이 되어 이 공포스러운 고립 속에서 절실하게 구원을 기다리게 된다. 영화는 끊임없이 선택의 기로를 제시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나의 선택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감독은 바람직한 선택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이 신념은 지나치게 순진하게 혹은 지나치게 엄격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의 관점에 대한 판단은 관객 각자의 몫일테다.


감탄스러운 것은 놀란이 그의 윤리관을 가장 적합한 틀과 방식으로 제시하였다는 것이다. <덩케르크>를 보고 나는 또 한번 놀란의 작품과 재능에 대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영화가 대중적으로 대단히 흥행할 것이라 보진 않는다. 그러나 놀란을 좋아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게 만드는 작품임은 확실하다. 심지어 나는 이 영화로 놀란을 조금 더 좋아하게 될 것 같다. 오랜만에 또 한번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을 것 같다. 이왕이면 큰 화면에 사운드가 좋은 관이면 좋겠다.



놀란 감독이 인터뷰 중 데미안 샤젤 감독의 <라라랜드>를 여러 차례 봤을 정도로 좋아한다고 언급했다.  왜 놀란이 데미안 샤젤의 영화를 좋아하는지 설명하긴 힘들지만 이해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굉장히 다른 영화를 만드는 것 같지만 둘에겐 분명 닮은 구석이 있다..!

이동진 평론가의 라이브톡 관람으로 감상에 영향을 받았다. 라톡 내용은 훨씬 깊었다! 좀 더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시간 관계상 마무리되어야 해서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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