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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롬 Aug 08. 2017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사람이 있다

로크 Locke(2013)

그저 운전했을 뿐이다


남자는 운전을 하고 있다. 차는 런던을 향해 달려간다. 이 차에 올라타기 전 남자에겐 화목한 가정이 있었고 남부럽지 않은 직장이 있었다. 그러나 운전대를 잡고 달려가며 그는 사랑도 일도, 모두 잃는다. 그는 그저 운전했을 뿐이다.


영화는 집요하게 이 남자를 파헤친다. 제목부터가 남자의 이름인 '로크(Locke)'다. 고작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운전 시간동안 남자의 삶은 낱낱이 해체된다. 그 벌어진 틈새 사이로 남자의 인생이 무너지고 쏟아진다. 감독은 가혹하다. 경로를 이탈해가는 모든 것을 어떻게든 바로잡으려 발버둥치는 남자를 비웃기라도 하듯 상황을 꼬아간다. 붕괴되어 가는 그의 내면을 그저 관찰하는 카메라의 시선 속에서 어쩐지 마음이 불편해진다. 죄책감이 든다. 남자는 흘러가는 강물을 거슬러보려는 듯 힘껏 손을 뻗어보지만 거대한 흐름 속에 자꾸 미끄러진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가 없다.



경로를 벗어나다


2013년 톰 하디 주연작 <로크 Locke>는 오로지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벌어지는 일만을 사실상 리얼 타임으로 담은 85분의 짧은 영화다. 상황 설정이 이렇다보니 당연히 등장인물도 운전자인 로크(톰 하디) 뿐이다. 로크는 한 통의 전화를 받고 가족들과의 약속을 뒤로 하고 차에 올라 탄다. 그는 이 선택으로 많은 것을 감당해야만 한다. 그가 엮인 모든 문제들이 안정적인 대로를 벗어나 옆길로 새어가기 시작한다.


성실하고 믿음직한 건설 현장 감독인 로크는 사랑스런 아내 카트리나와 두 아들을 둔 집안의 가장이다. 오늘 저녁엔 응원하는 축구팀 경기가 있는 날이라 일찍 들어가 가족들과 식사를 하며 응원할 참이었다. 내일은 그의 경력에 중요한 대형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날이기도 하다. 새벽부터 점검하러 나가야 하니 잘 쉬어두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베산(목소리 : 올리비아 콜맨)이다. 몇 개월 전 출장지에서 비서 역할을 해주었던 사람이다. 그녀의 아이가 예정보다 일찍 태어날 것 같단다. 아이의 아빠는 바로 자신이다.


로크는 베산을 사랑하지 않는다. 애정을 원하는 베산에게도 명확하게 밝힌다. 저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그러나 로크는 자신이 아이의 아버지라는 것만큼은 책임지고 싶다. 아니, 책임져야만 한다.


로크는 홀로 고투하는 베산을 위해, 무엇보다 자신의 핏줄인 새생명의 탄생을 지켜보기 위해 차를 출발시킨다. 런던으로 향한다. 이로써 오늘 저녁 단란한 가족 모임은 깨어졌다. 내일 현장 지휘도 힘들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굳건하게 믿고 있다. 모든 것을 제자리로 되돌릴 수 있어.



그 믿음을 증명해보이기라도 하듯 로크는 끊임없이 통화한다. 우선 아내 카트리나(목소리 : 루스 윌슨)에게 하룻밤의 불륜을 고백해야 한다. 새로 태어 날 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이상 이제는 숨길 수가 없다. 남자는 최대한 침착하게 아내에게 사정을 설명한다. 카트리나는 절망한다. 그 누구보다 믿음직한 남편이었기에, 단 한번도 의심한 적 없는, 의심할 필요도 없었던 남편이었기에 그의 배신에 그녀는 무너져내린다. 축구 경기에 열광하고 있던 아이들도 이상한 낌새를 채고 불안한 마음에 자꾸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온다.


한편 로크는 또한 내일 공사 현장이 문제없이 돌아가도록 체크해야만 한다. 우선 그가 현장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회사에 알린다. 실수 한 번 없던 듬직한 직원 로크가 하필이면 이 대형 프로젝트에서 펑크를 낸다니 믿을 수가 없다. 본사는 혼란에 빠진다. 그를 설득해보려 하지만 완고하다. 그렇다면 회사도 어쩔 수가 없다. 그에게 해고를 통보한다. 이미 해고는 각오했다. 그럼에도 로크는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내야만 한다. 자신이 시작한 일, 자신이 벌린 일의 매듭은 꼭 자신이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절친한 동료 도널(목소리 : 앤드류 스캇)을 믿어보기로 한다. 그에게 사소한 것 하나하나 지시해가며 현장을 준비시킨다. 본사에서 뭐라고 하던, 문제없이 마무리지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역시 쉽지 않다. 무엇 하나 수월하게 맞아 돌아가는 게 없다.


베산의 출산마저 순조롭지 않다. 몇개월이나 일찍 태어나는 아기는 심지어 탯줄이 목에 감겨 고생한다. 불안한 상태의 베산도 걱정이다. 외로운 그녀의 곁엔 손 잡아 줄 이 하나 없다. 아이의 아버지인 자신이 달려가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사람이 존재한다


남자의 완고하고 고지식한 태도는 언뜻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는 왜 그 길을 선택해야 했을까. 왜 단 하나도 타협하려 들지 않을까. 베산의 상황이 안타깝긴 하지만 오늘 저녁 아이의 탄생을 함께 하는 것이 이 모든 것을 감수할 정도로 중요할까. 아쉽지만 내일, 혹은 모레 그녀를 찾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애써 쌓아올린 커리어를 망치지 않아도 됐다. 아내에게도 이렇게 전화로 통보하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영화 <로크>의 훌륭한 점은 단 80여 분의 관찰을 통해 한 사람의 중심에 접근한다는 것이다. 쓸데없는 설명을 곁들이지 않는다. 영화가 시작하면 이미 그는 달리고 있고 남자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왜 운전을 하는 중인지, 누구와 통화를 하고 있는지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지켜보게 만든다. 그 어떤 편견도 없이 우리는 점차 남자를 알아가게 된다.


<로크>는 기본적으로 대중영화의 친절한 작법에서 벗어난 영화이지만 관객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 테크닉이 하나 있다. 남자의 혼잣말이다. 남자는 텅 빈 뒷자석을 바라보며 간혹 분노에 찬 말을 내뱉는다. 대상은 그의 아버지다. 그가 아버지에게 쏟아내는 말들 속에 우리는 이 남자를 이해할 힌트를 얻는다.


영화 <베리드>


<로크>와 유사하게 한정된 상황 속에 주인공을 가두는 방식을 취하는 영화들이 있다. 콜린 패럴 주연의 <폰부스>와 라이언 레이놀즈 주연의 <베리드>가 대표적이다. 두 작품 모두 외부와 소통하기 위해 전화를 이용한다. 대니 보일 감독의 <127시간> 역시 러닝타임 내내 제임스 프랭코 홀로 고군분투한다. 한국 영화로는 배우 하정우를 내세운 <더 테러 라이브><터널>이 가장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다. 곤혹에 빠진 주인공을 관찰하게 하는 이 영화들은 신선한 아이디어와 설정을 통해 스토리 진행의 동력을 얻어 상대적 저예산으로도 영화의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유지한다.


<로크>가 이들과 다른 점은 주인공이 곤경에서 탈출하느냐의 여부가 중요치 않다는 것이다. 언급한 위의 영화들은 모두 영화의 결말과 사건의 결과가 함께 가지만 <로크>는 조금 더 인물에만 집중한다. 이 영화를 통해 얻게 되는 것은 악조건 속에 분투하는 주인공에 이입하여 얻게 되는 상황의 체험이 아니다. <로크>는 한 사람을 깊이 있게 알아가는 체험을 준다. '아이반 로크'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것, 그리하여 결국 '로크'라는 나와 다른 한 인간의 존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이다. 그래서 <로크>의 마지막은 아무 것도 해결해주지 않는다. 아이반 로크는 여전히 뒤엉킨 상황 속에 모든 것이 망가진 그대로다. 그러나 잠시 멈추었던 그가 다시 운전대를 잡고 어둠 속에 런던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아이반 로크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 남들의 눈에 어떤 모습이든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한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결국은 납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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