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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롬 Aug 02. 2017

휴가 :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휴가를 함께 한 책 4권

일주일간의 여름 휴가가 있었다. 다들 휴가 계획 세우기에 열중인 듯했지만 나는 정말이지 아무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의도한 건 아니고 단순히 게을러서였지만 결과적으론 잘했다 생각한다. 나는 원래가 게을러 먹은 인간이라 나태가 체질에 너무 잘 맞는다.


일전에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만약, 정말 만약에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대학에 합격하고 입학하기 전의 그 몇 달, 그때가 좋겠다고. 이후로 겪어내야 할 그 모든 강제적 삶의 전진을 유보할 수 있었던 시간. 지나고 보니 인생에 그런 시간은 정말로, 다시는 없을 것이더라. 나는 그때도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았었다. 남들 다 딴다는 운전 면허증도 안땄다. 자격증이니 뭐니하는 진취적인 자세따윈 당연히 없었고. 그저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염없이 늘어진 시간을 태평하게 즐겼다. 후회하지 않는다. 다시 생각해봐도 인생에 그렇게 속 편히 시간을 죽일 수 있는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으니까.


나태에 대한 합리화는 여기까지로 하고, 그래도 휴가 동안 책 몇 권, 영화 몇 편은 보았다. 집에 늘어져 모든 에너지를 제로 상태로 만들고도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역시 ‘보는 것’ 아니겠나. 보고 듣는 건 막을래야 막을 수 없으니 TV를 보고 책을 보고 영화를 봤다. 다행히도 나의 선택들이 나쁘지 않았는데 역시나 귀찮아서 흘려두고 있다가 그냥 넘기기엔 조금 아쉬워져 간략한 감상이나마 기록해놓으려 한다.


4권의 책

라디오헤드로 철학하기(브랜든 포브스,조지 A. 레이시, 마크 그레프 외)
잠의 사생활 : 관계, 기억, 그리고 나를 만드는 시간(데이비드 랜들)
환상의 빛(미야모토 테루)
금수(미야모토 테루)


라디오헤드로 철학하기



사실 라디오헤드의 음악을 제대로 들어본 적도 없으면서 호기롭게 골라 들었던 <라디오헤드로 철학하기>는 의외로 재미있게 읽혔다. 나처럼 라디오헤드에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도 읽을 수 있는 교양 철학서다. 물론 알고 보면 더 재미있겠지. 여러 명의 저자가 쓴 글들을 묶었기 때문에 작가나 주제에 따라 취향을 좀 탄다. 라디오헤드의 음악, 가사, 뮤직비디오를 비롯해 그들의 사회적 행보까지 철학적 시선으로 분석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니체,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개인적으론 제르 오닐 서버(JereO’Neill Surber)가 쓴 애브젝트 미학에 대한 파트가 가장 흥미로웠다. (그나마 쉽게 읽히는 파트여서일지도.)


오브제Object가 자세하고 명료하게 설명된 것(그건 그거야, 저게 아니고)이고 서브제Subject가 오브제와 확실하게 분리된 것(나는 나야, 그 어떤 것도 내가 아니야)이라면 애브젝트Abject는 항상 그 경계에 있다(이것이면서 저것이거나 이것도 저것도 아니거나). 예를 들어 절단된 손가락은 ‘나’이면서 ‘더 이상 내가 아닌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내가 아는 사람의 시신은 그 사람이기도 하면서 그 사람이 아니기도 하다. 또는 안드로이드(˹Paraniod Android˼의 안드로이드)는 인간도 아니고 단순한 기계도아니다. 이러한 현상은 확실하게 나누어 정의하려고 했던 세계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라디오헤드의 전반적인 음악스타일과 이와는 다른 과격적인 변화는이런 ‘경계선상에 있는현상’을 가장 잘 설명해준다. ˹OK Computer˼까지의 곡들은 톰 요크의 유약하고 자기성찰적인 보컬과 조니 그린우드의 격렬하고 귀를 괴롭히며 외향적인 기타 연주사이의 경계가뚜렷하다. 그러다가 ˹Kid A˼를 기점으로 이 경계는 완전히 무너져 ‘록 음악도 아니고 얼터너티브도 아닌’ 완전히 새로운 음악이 되었다.

-  4. 새로운안경 : 애브젝트 미학으로 경계를지우다 (<라디오헤드로 철학하기> 中)


잠의 사생활 : 관계, 기억, 그리고 나를 만드는 시간



저널리스트인 데이비드 랜들이 어느 날 몽유병으로 밤중에 걸어다니다가 다치는 사건 이후 잠에 대해 파고들며 쓰게 된 책이다. 흥미로운 주제를 뽑아내고 인상적으로 어필하는 기자다운 감각이 두드러진다. 잠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 주는 책이지만 읽다보면 여전히 인생의 1/3을 차지하는 잠의 세계가 미스터리로 가득하다는 사실 역시 깨닫게 된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잠과 꿈을 온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어쨌든 잠을 잘자는 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얘기.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늘어지게 자다 깨다를 반복하는 와중에 읽었다. 그래도 될 만큼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서 다행.


환상의 빛 / 금수


언젠가 읽어봐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던 미야모토 테루의 소설이 집 근처 작은 도서관에 마침 구비돼 있는 걸 발견하고 두 권을 빌려왔다. <환상의 빛>과 <금수>는 마치 쌍둥이 같은 작품이라 함께 읽으니 더 좋더라. 미야모토 테루의 소설은 영화화도 많이 되었는데 나 역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로 <환상의 빛>을 먼저 접했다. 영화도 좋았지만 이번에 책을 읽어보니 소설 쪽이 개인적으론 더 마음에 들었다.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버린 남편의 사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고민하는 유미코라는 여성이 주인공으로 죽은 남편에게 쓰는 편지체의 짧은이야기다. <금수> 역시 서간체 소설인데,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이혼에 이른 부부가 십년만에 재회하여 서로 편지를 주고 받는 형식이다. 아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십년 전의 사건에 사로잡혀 우연히 재회한 전남편에게 그날의 진실을 묻는 편지를 보내고 남편은 이에 답장한다. 두 사람 모두 아직 마무리 짓지 못한 과거에서 헤매이지만 소설을 읽어나가다 보면 그보다 더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들이 서 있는 현재의 시간들이다. 담담하기에 더 감성적으로다가오는 미야모토 테루의 문체가 좋다. <환상의 빛>에 수록된 또 다른 단편 <밤 벚꽃>도 못지않게 좋았는데 그녀의 집에서 내려다보는 밤 벚꽃 풍경을 상상하게 된다. 밤을 수놓으며 흐드러지게 핀 꽃자락이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그날에 어떤 의미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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