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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롬 Aug 10. 2017

내가 비정상인 건 지극히 정상이야

만화 / 제가 좀 별나긴 합니다만...(아스퍼거 증후군 이야기)

나는 왜 별날까


나는 약속을 잡는 데 뜸을 많이 들이는 편이다. 상대방 입장에선 답답하고 짜증날 테니 안그러려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항상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흔쾌히 "그래, 그날 저녁에 봐!"라는 답이 안나온다. 상대가 싫어서가 아니다. 외려 만나면 정말 좋다. 그러나 나에게 약속은 만나서 함께 하는 시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를 위해 준비하는 시간, 약속장소로 이동하는 시간, 약속이 끝나고 귀가하는 시간, 돌아와서 옷을 갈아입고 씻는 등 마무리하는 과정까지를 모두 아우른다. 그 모든 걸 머릿 속에서 계산하느라 답이 늦어진다. 약속 장소가 멀면 에너지가 하나 더 들고, 공식적인 자리라 평소보다 차려 입고 가야 하는 곳이면 곱절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나는 항상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가 한정된 사람이라 느껴왔다. 만나야 할 사람이 많거나 여러 곳을 다녀야 하는 일정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혹여 그런 날이 생기면 중도에 방전되기 일쑤였고.


왜 나는 어떤 활동(사람을 만나건, 운동을 하건, 쇼핑을 하건)을 해도 에너지 소모와 연결짓게 될까 고민해봤었다. 사실 사회 생활하기에 이보다 안좋은 태도가 없지 않나. 굳이 회사 생활이 아니더라도, 그냥 마음 맞는 친구를 만나는 일에조차 영향을 미치니까. 속상했다. 난 왜 안되지. 남들은 회사 사람들이랑 어울려 밥 먹고 회식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 않는데, 오늘 저녁 당장 만나자는 친구들의 번개에도 단박에 오케이가 되는 것 같던데.


출처 : 알라딘


얼마 전 습관처럼 알라딘 사이트를 구경하는데 만화책 한 권이 눈에 띠었다. <제가 좀 별나긴 합니다만…>이란 제목이었다. 딱 봐도 유럽에서 온 게 분명한 그림체의 이 만화책엔 ‘아스퍼거 증후군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있었다.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면 나랑은 관련없는 이야기겠지 생각하면서도 그냥 제목과 그림체에 끌렸다. 일단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다.


몇 주 후 친구와 교보문고를 거닐다 이 책을 다시 발견했다. 친구는 그 근처에 비치된 순정만화에 끌리는 것 같았지만 나는 역시 이쪽이 마음에 들었다. 책이랑도 인연이 있는 법이라 이렇게 자꾸 눈에 들어오면 결국은 만나게 되더라. 그 며칠 후 나는 결재 버튼을 눌렀다.



내가 비정상인 건 지극히 정상이야


일단 글이 별로 없기 때문에 1-2시간 남짓이면 충분히 다 읽을 수있는 책이었다. 첫 눈에 마음에 들었던 그림체 역시 내용과 잘 어울렸다. 주인공은 마그리트라는 20대 여성으로 겉보기엔 아무 문제 없는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 안정적인 직장이 있고 동거하는 남자친구도 있다. 그러나 가까이서 들여다 보면 그녀의 삶은 불안함 투성이다. 남들보다 지각이 예민한 그녀는 소음을 잘 견디지 못한다. 회사 워크샵에 제대로 참석한 적이 없어 지적받고, 남들의 농담을 잘 이해하지 못해 직원들과의 대화에 어색함이 흐른다. 쇼핑은 자주 하지 않지만 한 번 옷을 살 때는같은 옷을 색상별로 여러 벌 구매하곤 한다. 워낙 예민해서 입을 만한 옷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친구도 연인도 그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주변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못하는 마그리트가 남자친구인 플로리앙 입장에선 답답하다. 파티에 참석하거나 놀러가자는 제안이 번번히 거절당하자 플로리앙도 상처받는다.


홀로 고민하던 마그리트는 자신을 제대로 직면해 보기로 마음 먹는다. 정신과 상담을 받고 정식 검사 과정을 거쳐 내려진 진단은 그녀가 아스퍼거 증후군, 즉 자폐라는 것이다. 진단 결과가 나온 날 마그리트는 밝은 얼굴로 플로리앙에게 말한다. 내가 비정상인 건 지극히 정상이야.


20대가 훌쩍 지나도록 자폐를 모르고 살 수 있나 싶지만 실제로 그런경우가 많다고 한다. 아스퍼거는 워낙 증상이 다양하여 진단도 어렵고,특히 여성의 경우 고통을 감추고 가장하는 능력이 뛰어나 더더욱 알아채기 어렵다고. 자폐 스펙트럼상 장애 인구의 비율은 150명 당 한명 꼴로 의외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폐증세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출처 : 알라딘


솔직히 만화를 읽어나가며 마그리트에게 자꾸 나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 처음엔 조금 두려웠다. 설마 나도 자폐인건 아닐까. 자폐라면 장애잖아. 나에게 장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건 무척 불편한 일이었다. 나는마그리트만큼 옷에 예민하지 않고, 소음을 못 견뎌하지 않으니 설마 아니겠지, 그렇게 위안해 보기도 했지만 역시나 비슷한 점이 너무 많았다.


이 만화를 통해 내가 아스퍼거라는 걸 깨닫게 됐어, 라는 얘기를 하고싶은 건 아니다. 150명 중에 한 명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은 있겠지만 어쨌든 나는 아스피가 아닐지도 모른다. 혹여 맞다고 해도 아마 아주 경미한 증세를 지닌 축이겠지.


의학적으로 나 같은 사람을 아스피로 분류하던 아니던 나에겐 분명 자폐적 기질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게 그렇게 놀라운 일도 아닌 것 같고. 마그리트가 말했듯 내가 비정상인 게 지극히 정상이니까, 스스로가 이런 사람인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받아 들이려 한다.


The Spoon Theory


책의 말미에서 마그리트는 ‘작은 숟가락 이론(The Spoon Theory)’을 언급한다. 워낙 공감되는 이론이라 검색해보기까지 했다. 작은 숟가락 이론은 2003년 크리스틴 미제랑디노(Christine Miserandino)가 쓴 동명의 에세이에서 비롯된 명칭으로 카페에서 친구와 이야기 나누는 와중에 생각해 냈다고 한다. 장애나 만성질환이 있는 사람들은 일반의 건강한 사람들과 달리 활동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숟가락의 수, 즉 에너지가 한정돼 있다는 것이 주 골자다. 만화의 주인공 마그리트의 경우 열 두개의 숟가락을 가지고 있다. 방전되지 않으려면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일과에 숟가락을 분배해두어야 한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다.


복도에서 5분간 이웃과 대화 : 1 숟가락
대중교통 이용 : 2 숟가락
슈퍼마켓에서 장보기 : 2 숟가락
여럿이 모이는 저녁 파티 : 4 숟가락
예기치 못한 일이나 격렬한 감정에 대처하기 : 2-4 숟가락


만약 하루의 숟가락을 초과로 사용해야 한다면 미래의 숟가락을 빌려오는 수 밖에 없다. 즉 내일 숟가락을 덜 써야 하는 것이다.


이 이론이 너무 나의 평소 생활 방식과 똑같아서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아닌가 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 Sound Mind, Sound Body로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나는 개중 그냥 이런 쪽의 증상을 지닌 사람인 거겠지. 이왕 숟가락 개수가 한정된 거, 배분을 잘해서 웬만하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좋아하는 일에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늘은 안타깝게도 회식을 한다하니 아, 숟가락 세 개는 날아갈 것 같아 벌써 피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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