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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롬 Aug 24. 2017

어느 민폐 여주를 위한 변명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1997)


여기, 내가 사랑하는 민폐 여주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최악의 평 중 하나는 ‘그 캐릭터 민폐’라는 것 같다. 일단 민폐 캐릭터로 낙인 찍히고 나면 걷잡을 수 없다. 캐릭터에 대한 비아냥이 온라인을 통해 번지기 시작하고 순식간에 작품의 이미지는 ‘망’이 된다. 회생은 거의 불가능하다. 요즘의 대중들은 ‘민폐’와 ‘고구마식(목구멍이 턱턱 막힐 정도로 답답한) 전개’를 참아내지 못한다. 나 역시 화려한 액션을 선보이는 남자 주인공 옆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휩쓸리다 괜히 적에게 붙들려 또 한 번 위기를 초래하는 여주인공을 차마 좋게 봐 줄 수가 없다. 작품이 캐릭터를 어떻게 대우하고 있느냐에는 감독의 가치관이 개입되어 있기 마련이고 관객인 우리는 당연히 그것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 내가 사랑하는 여주인공이 있다. 그녀는 결혼을 며칠 앞둔 새신랑과 새신부 앞에 나타난 (본인의 표현에 의하면) ‘곰팡이’ 같은 존재다. 어떻게든 이 결혼을 파토 놓으려 온갖 짓거리를 해대는 그녀는 정말이지 못됐고 못났다. 그렇다. 그녀는 그 유명한 ‘민폐여주’다.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My Best Friend's Wedding


이미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클래식이 되어버린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은 내가 꼽는 최고의 로맨스물 중 하나다. 다만 동의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아마 이 영화의 주인공이 사실상 악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음식 비평가 줄리안(줄리아 로버츠)은 대학 시절 만난 마이클 오닐(더못 멀리니)과 9년째 절친 사이를 이어오고 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너무 잘맞는 이 관계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 두 사람 모두에게 서로는 ‘One and Only’다. 둘은 스물 여덟이 될 때까지 적절한 짝을 찾지 못하면 결혼하자는 장난스런 약속을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이클은 줄리안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전한다.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그러니 나의 가장 소중한 날에 가장 소중한 네가 꼭 곁에 있어주었으면 한다고. 줄리안은 그제야 마이클에 대한 자신의 절절한 사랑을 깨닫는다. 앞으로 나흘 후 그는 남의 남자가 된다. 마음이 급해진 줄리안은 당장 비행기를 타고 시카고로 날아간다. 그녀의 머릿속엔 어떻게든 이 결혼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다.


줄리안이 저지르는 일들은 정말이지 치졸하기 그지없다. 두 사람 사이를 이간질하려 각각에게 은근히 상대방에 대한 악담을 늘어놓고 일부러 곤란한 상황을 자꾸 유도한다. 마이클이 소중한 친구 줄리안을 철썩같이 믿고 있는 가운데, 약혼녀 킴벌리(카메론디아즈)는 사랑하는 남자의 절친이라는 그녀와 친해지고 싶어 진심으로 다가온다. 마이클의 신뢰와 킴벌리의 호의를 양쪽 다 배반하며 줄리안은 가책을 느끼지만 9년이나 키워 온 거대한 사랑을 가만히 포기해 버릴 순 없다.



문제는 킴벌리가 너무나 사랑스럽다는 것이다. 어리고 예쁘고 부유한 그녀는 심지어 진심으로 마이클을 좋아하는데다 미워할 수 없이 순수하기까지 하다. 누가 봐도 킴벌리는 마이클의 완벽한 짝이다. 줄리안 역시 그녀의 사랑스러움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녀를 싫어하지 않아도 됐다면 난 정말 그녀를 사랑했을 거야


그럼에도 줄리안은 결국 마이클에 고백한다. 너를 너무 사랑한다고, 그 마음을 깨달으니 이렇게 너를 그냥 보낼 수가 없어졌다고.


그녀의 사랑은 결국 실패한다. 온갖 미운 짓을 다하고, 결국엔 고백까지 해보았지만 마이클은 킴벌리를 선택하고 두 사람은 예정된 결혼식을 올린다. 못된 악당에 딱 걸맞은 결말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줄리안을 미워하지 않는다. 전말을 알게 된 킴벌리는 믿을 수 없게도 그녀를 깊이 껴안아 준다. 마이클의 결혼식에 홀로 앉아있는 줄리안에게는 그녀의 편집장이자 조력자인 친구 조지(루퍼트 에버렛)가 다가가 춤을 청한다. 감독은 왜 이 악당을 이다지도 따뜻하게 대하는 것일까.



예고된 패배 앞에 조금, 발버둥쳐 보았다

사랑은 타이밍, 이라고 말한다. 이 말이 이토록 유명한 이유는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타이밍을 놓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는 너무 빨라서, 누군가는 너무 늦어서. 그때 그 타이밍을 잡는 건 참 쉬웠을 것 같아서 더 아쉽다. 이제 와선 모든 게 너무 어려워져 버린다.


리허설도 없고 예고도 없어 사랑 앞에 미성숙한 우리는 자주 타이밍을 놓친다. 어떻게 9년이나 사랑했으면서 모를 수 있냐고, 어떻게 그걸 이제야 깨달을 수 있냐고 줄리안의 미성숙함을 타박하긴 쉽겠지만 사실 누구나 그럴 수 있다. 내 감정이지만 내 의지로 조종하는 것이 아니지 않나. 내 마음을 나도 모르는 경우는 굳이 사랑이 아니어도 너무나 많다. 친구 사이를 이어오던 관성 때문이건 자존심 때문이건, 그냥 모를 수도 늦게 깨달을 수도 있다. 답답한 일이지만 절대 잘못이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줄리안이 나흘동안 벌인 일들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욕먹어도 할 말 없다. 다만 내가 줄리안을 미워할 수 없게 만들었던 건 그녀의 게이 친구 조지와 관련이 있다.



많은 여성들에게 ‘게이 친구’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데 일조한 조지 도니스(루퍼트 에버렛) 캐릭터는 무척 특별하다. 조지는 언뜻 줄리안이 벌이는 악행의 공범자인 듯 보이지만 사실 그녀에게 단말의 희망도 주지 않는 사람이다. 고뇌에 빠진 줄리안에게 조지는 이렇게 말한다.


- 그에게 온마음을 다해 사랑한다고 말해.
  9년동안 줄곧 사랑했지만 깨닫기 두려웠다고.
  사랑하기 두려웠다고 말해. 누군가에게 속하는 게 두려웠다고.
  안타깝지만 줄리안, 누구나 다 그래.
  사랑한다 고백하기에 최고로 바보같고 잔인한 순간인 걸 알지만 말하는 거라고.
  그러면 그가 선택할거야.
- 그가 어떻게 할까?
- 그는 킴을 선택할거야.
  그럼 너는 결혼식에서 그녀 곁에 서있다가 그에게 굿바이 키스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돼.

- Tell him you love him. With all yourheart.
  Tell him you’ve loved him for nine years, but you were afraid to realize it.
  Tell him you’re afraid of love. Afraid of needing, to belong to someone.
  We all do, beautiful. I’m sorry about that.
  Tell him you know this is the worst, dumbest, cruelest moment to do this to him.
  But there it is, and he has to choose.
- And what will he do?
- He’ll choose Kim. You’ll stand by her at her wedding.
  You’ll kiss him good-bye. And you’ll go home.



조지는 마이클이 킴벌리를 선택할 것을 알고 있고, 사실은 줄리안도 그렇다. 조지는 해피엔딩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도 줄리안의 곁에서 그녀를 돕는다. 중요한 건 줄리안 역시 계속해서 조지를 찾는다는 것이다. 조지는 그녀에게 현실을 일깨우는 존재다. 꿈에서 깨라고, 그 남자는 이제 네 것이 아니라고 항상 정확하게 이야기해 준다. 달콤한 말을 해줄 응원자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줄리안은 그러지 않는다. 영화의 결말부 마이클에게 키스하는 것을 킴에게 들키고 사랑의 추격전(?)이 벌어질 때도 그 바쁜 와중에 줄리안은 조지에게 전화한다.


- 마이클이 키미를 쫓아가고 있다고?
- 응!
- 너는 마이클를 쫓아가고?
- 응!
- 너를 쫓아오는 건 누군데? 그게 답이야. (마이클의 선택은) 키미인 거야.

- Michael’s chasing Kimmy?
- YES!
- You’re chasing Michael?
- YES!
- Who’s chasing you…nobody, get it? There’s your answer. It’s Kimmy.


줄리안에게 조지는 일종의 ‘양심의 소리’와 같다. 줄리안이 조지를 찾는 것은 그 입 바른 소리가 자신에게 필요해서다. 자신이 잘못하고 있음을, 이 사랑은 이제 끝내야 함을 조지의 목소리로 스스로에게 계속 들려주는 것이다. 나아가는 마음과 다잡아야 하는 양심 사이에서 줄리안은 끝없이 후회하고 갈등한다. 사랑의 고백조차 “나는 곰팡이 같다(I'm like the- the fungus that feeds on pond scum)”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그녀는 사실 누구보다 열심히 반성하고 있는 캐릭터다. 그녀는 온갖 민폐를 끼치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양심을 찾아간다.


타이밍을 놓친 대가로, 사랑 앞에 조금 둔했다는 이유로 그녀는 예고된 패배를 맞이해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그 앞에 나약한 발버둥이나마 저항하려는 그녀의 모습을 마냥 밉게 볼 수가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 도무지 미워지지가 않았다. 그건 여전히 '모든 나의 감정’에 둔한 내 모습이기도 했다. 킴벌리의 포옹은 이렇게나 밉고 찌질한 우리에게 감독이 보내는 위로다. 줄리안을 껴안아 준 키미가 너무 고마워서, 나는 이 옛날 로코를 보면서 믿을 수 없게도 펑펑 울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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