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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롬 Sep 08. 2017

세상에 당연한 건 없어

지대넓얕 팟캐스트 종영

세상엔 인간을 구분하는 수많은 기준이 있다. 성별, 나이, 인종, 종교를 비롯하여 재산, 출신지, 학벌까지 일일이 나열할 수 없는 이 모든 것들을 근거 삼아 a는 A, b는 B라고 구분짓곤 한다. 개중 특히 한국 사회에서 많이 사용되는 기준이 있으니 바로 '문과'와 '이과'다. '나는 문과형 인간이야' 혹은 '이과형 인간이야'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문/이과의 구별이 명확한 한국 교육의 현실에서 나타나기에 무척 적합한 말인 것 같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2학년에 올라가면서 나는 인생 최대의 갈림길 앞에 섰다.(물론 그때 당시 기준이다.) 굉장히 중요한 선택인 것 같은데 주변 친구들은 어쩐지 별다른 고민이 없어보였다. 모두는 아니었지만 대부분이 당연하다는 듯 이미 마음을 정하고 있었다. 당연히 문과, 당연히 이과. 


그런데 나는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부모님은 이과를 갔으면 하셨다. 나는 수학을 좋아했고 나름대로 잘하는 편이기도 했는데, 그러다보니 주변에서 너는 당연히 이과, 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그런데 나는 어쩐지 문과가 끌렸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 보단 그냥 문과쪽 수업, 그러니까 사회과학 과목들이 더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연과학 수업은 너무 재미가 없었다. 도저히 저 수업들을 앞으로 수능까지 남은 2년 내내 듣고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당시의 나는 과학이 정말 싫었다.


고민 끝에 문과를 선택했다. 결국 나는 나 좋을대로 하는 스타일이라 고민하면서도 사실 그렇게 될 걸 알고 있었다. 실제로 문과 수업들은 나와 궁합이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내용은 다 까먹었지만 국사도 재밌었고, 지리 선생님의 열강은 지루한 수험 생활에 나름의 활력이었다.



내가 과학에 좀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아주 근래의 일이다. 이미 과학과 멀어질대로 멀어진 상태에서 갑자기 재미를 느낀 건 '지대넓얕' 팟캐스트 때문이었다. 지대넓얕은 스스로의 무식함에 진저리를 치고 있던 그맘때의 나에게 딱 적합한 팟캐스트였다. 이전부터 명성은 익히 들어왔지만 굳이 들어보겠다는 생각은 않고 있었는데 우연히 한 번 들어보니 이게 참 괜찮은 거였다. 다루고 있는 주제도 다양하고 패널들의 목소리도 하나같이 듣기 편하고. 특히 서로간에 관심사가 달라 각자의 분야에 대해 잘 모르는 패널이 늘 존재했기 때문에 어려운 내용에 대해서 계속해서 질문을 던져가며 청취자와 함께 이해해 간다는 점이 좋았다. 그런 와중에 생각치 못했던 관점이 제시되기도 하고 새로운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흥미로운 대화의 장이었다.


그 중에서도 내가 자주 골라 들었던 건 '독실이'가 준비한 파트였다. 주로 과학과 관련된 주제를 도맡았고 간혹은 전혀 전공과 다른 주제를 선택하기도 했다. 처음엔 외려 과학 관련 회차들은 일부러 제외해가며 들었었는데 중간중간 과학적 설명을 곁들이는 독실이의 선명한 목소리에 신뢰를 얻었다. 우주의 탄생, 블랙홀같은 주제부터 수학, 화학, 전자기학에 대한 일반적 내용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독실이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었다.


워낙 설명을 잘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어느 회차였던가 독실이가 무심코 뱉은 한 마디가 나에게 큰 자극으로 다가왔다.


 "여러분 펌이 뭔지 알아요? 머리카락을 이루는 단백질을 끊었다가 그걸 꼬아서 다시 붙이는 거에요."


나에겐 이 말이 너무 충격이었다. 아무 생각없이 미용사에 내맡기고 있었던 '파마'가 이렇게나 과학적인 과정이었다니. 담갔다 꼬았다 감았다 하고 나면 머리가 빠글빠글해지는 게 너무 당연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당연한 게 아니었던 거다.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는 사실이 갑자기 너무 강하게 와닿아 정신이 멍해졌다.


이후에 책을 좀 읽기 시작했다. 과학을 좀 알고 싶어졌어요, 라고 아는 박사님께 말했더니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대뜸 추천해주셨다. 그 명성에 압도당하여 제가 감히 읽을 수 있을까요, 했더니 너무나 태연하게 당연하지, 라더라. 더불어 <과학하고 앉아있네> 시리즈도 추천해주셨는데 과학 분야 팟캐스트 방영분을 짧은 책으로 엮은 것이었다. 이 정도는 읽어볼 수 있을 것 같아 도전해보았다.


이후 우주나 수학에 대한 다큐를 몇 편 찾아보다 BBC 양자역학 다큐멘터리에 빠지기도 했다. <과학하고 앉아있네> 시리즈 중에서도 나는 양자역학을 다룬 편이 가장 재미있었다. 양자역학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양자 도약이나 스핀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이게 실제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게 도무지 믿겨지지가 않았다. 이 정도면 SF 판타지 소설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BBC 다큐 <ATOM>


과학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이렇게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은데 나는 왜 그렇게나 싫어했을까 뒤늦게 고민해봤다. 좋아할 수 있는 계기만 있었다면 분명 나는 충분히 과학을 즐길 수 있었을 거다. 이과나 문과를 선택하는 문제를 떠나서 말이다.


남탓을 하자면 당시 나에겐 과학에 흥미를 갖게 해줄, 재미를 느끼게 해줄 누군가가 없었다. 나에게 과학의 세계에 첫 물꼬를 틔워준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그 과목 담당 선생님들일텐데 하나같이 수업이 정말 지루했다. 그래서 과학의 첫인상도 덩달아 나빠질 수 밖에 없었다. 과학은 원래 딱딱하고 재미없는 거구나, 생각했었다. 독실이 같은 선생님을 만났다면, <E=mc2><코스모스>(얼마 전에 완독했다!)같은 책을 좀 더 일찍 접했다면 나는 지금보다 조금 넓은 사람이 돼 있을 수 있었을 것 같아 조금은 아쉽다.


'문과'라는 한쪽을 선택한 이후로 나는 과학을 다시는 거들떠 보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았다. 문과와 이과라는 꼬리표를 단 순간 우리는 서로의 분야에 무관심할 권한을 얻은 것 같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문과나 이과는 편의상의 구분일 뿐인데 말이다. 극과 극은 닿는다고, 과학도 철학도 결국 세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인 건 마찬가지인데 데 우리는 어떻게든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떼어놓고 이해하려 한다. 한계를 짓고 세상을 바라보면 한계 안의 것들 밖에 볼 수 없으니, 문과와 이과의 프레임에 갇힌 우리는 반쪽 세상만 보고 살아가는 셈이다.



얼마 전에 지대넓얕이 종영했다. 일단은 시즌 종료라고 하지만 언제 돌아올 지 알 수 없다. 결산 방송을 들어보니 꽤 오랜 휴식기가 될 것 같은 느낌이다. "저는 지대넓얕이 영원할 줄 알았어요"라는 독실이의 말에 조금 서글퍼졌다. 당연히 계속 들을 수 있는 목소리일 줄 알았는데. 역시나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


나에겐 정말 훌륭한 위로이자 즐거움이었다. 무엇보다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재미인지 오랜만에 다시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회사 생활을 하고 그냥 그렇게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다보면 궁금한 게 없어진다. 모든 게 당연해진 세계에 그들은 그게 왜 당연하냐고 물어주었다. 챙겨 듣다보니 어느새 나 홀로 정이 들어버린 것 같다. 그래서 혼잣말이나마 여기에 인사를 남긴다. 고마웠어요.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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