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1982) 복습하기
올해 남은 하반기에 내가 기대하고 있는 단 두 작품이 있으니 바로 <베이비 드라이버>와 <블레이드 러너 2049>다. (베니스에서 황금종려를 수상한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더 셰이프 오브 워터>도 기대되긴 하지만 개봉일자가 확정되지 않았으니 제외한다.) <베이비 드라이버>는 바로 내일(!!) 개봉한다. 벌써부터 두근두근.
<블레이드 러너 2049>는 무려 30여 년만에 공개되는 <블레이드 러너>의 후속작이다. <블레이드 러너>의 사연은 참 흥미롭다. 이 야심으로 가득 찬 걸작은 개봉 당시엔 외려 차가운 외면 속에 뼈아픈 실패를 맛봐야 했다. 비슷한 시기에 스필버그 감독의 <E.T.>가 개봉했던 탓이라고 얘기되기도 하지만 애초에 대중들이 좋아할만한 이야기가 아닌 게 사실이다. 어둡고 암울한 미래상과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 스토리. 일반적으로 SF 블록버스터를 보러 극장을 찾는 관객들이 즐기고 싶어할 만한 영화라곤 할 수 없다. 그럼에도 결국 이 영화는 사람들의 입을 타고 화려하게 부활했고 컬트적 지위를 확보함과 동시에 최고의 SF 중 하나로 손꼽히는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
연출직은 내려놨지만 리들리 스콧이 제작자로 참여한 이상 <블레이드러너 2049> 역시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전작의 주인공 해리슨 포드가 재등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후속작을 보기 전에 재관람은 필수. 늦기 전에 <블레이드 러너>를 다시 봤다.
<블레이드 러너>는 기본적으로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배경으로 한 느와르 영화다. 신체적으로 건강하고 경제적으로도 여유있는 대부분의 지구인은 이미 이 행성을 떠나 우주 식민지에 자리잡았다. 지구에 남은 건 대개 떠날 권한을 부여받지 못한 약자들이다. 식민지를 개척해가는 과정에서 인간은 '리플리컨드'라는 존재를 만들어내게 된다. 인간과 동일한 유전자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리플리컨트는 식민지 개척 전쟁이나 노동, 성노예 등의 용도로 사용되며 철저히 인간을 위해 봉사한다. 내외부적으로 완전히 인간과 동일한 리플리컨트를 인간과 구분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테스트(보이트-캄프 테스트)가 필요하다. 이 테스트는 일련의 질문들에 대한 홍채의 반응을 관찰하여 정체를 판단하는 방식으로 숙련된 평가자의 존재가 중요하다. 리플리컨트의 수명은 4년으로 정해져 있으며 이후 폐기(retirement)되는데, 이는 리플리컨트들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질 때쯤 폐기함으로써 혹시 모를 혼란 사태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2019년의 LA, 주인공 데커드(해리슨 포드)가 빽빽하게 솟아오른 마천루 아래 그늘진 거리에서 등장한다. 혼잡하고 불결한 길거리는 주로 동양인이 운영하는 잡다한 상점들이 점령하고 있다. 한 무리의 형사가 데커드를 붙들고 서로 향한다. 사연인즉슨 리플리컨드 일당 여섯이 자신들의 상황에 불만을 품고 탈출을 감행하여 지구에 숨어들었는데 그 중 둘은 이미 붙잡혔으니 나머지 넷의 검거를 도와달라는 것이다. 이미 은퇴한 '블레이드 러너(리플리컨트 검거를 담당하는 특수경찰)' 데커드는 리플리컨트 검거와 보이트-캄프 테스트에 있어 당할 자가 없는 베테랑이다. 데커드는 부탁을 수락하고 도망친 리플리컨트들의 뒤를 쫓는다. 이후 데커드는 수사 과정에서 만나게 된 리플리컨트 레이첼(숀 영)과 사랑에 빠지며 혼란을 겪게 된다.
한편, 리플리컨트 일당의 리더인 로이 베티(룻거 하우어)는 예정된 '폐기' 운명에 저항하기 위해 자신들의 창조주를 찾아나선다. 그는 유전공학자 J.F. 세바스찬을 거쳐 마침내 리플리컨트 제조사의 대표 타이렐 박사(조 터겔)를 마주하게 된다.
<블레이드 러너>가 던지고 있는 질문은 리들리 스콧 감독의 또다른 야심작 <에이리언> 시리즈와도 맥을 같이 한다. 에이리언 시리즈에서도 인간은 새로운 생명(인공지능)을 스스로 창조해내는 한편 자신들의 창조주를 찾아 떠난다. 그 모든 과정은 결국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으로 귀결된다. 과연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육체
리플리컨트는 인간과 동일한 유전자를 공유한다. 다만 그들의 세포는 4년동안만 기능한다. 4년이 지나면 그들을 이루고 있던 세포들이 스스로 허물어지고 작동을 중지한다. 인간에겐 정해진 기한이 없다. 그러나 인간 역시 유한한 존재인 건 마찬가지이다. 영화 속 개프가 던지는 수수께끼같은 대사 "It's too bad she won't live, but then again, who does?(그녀가 죽게되어 안타깝군요. 그러나 누군들 안그럽니까?)" 역시 의미심장하다.
감정
인간과 마찬가지로 리플리컨트는 감정을 가질 수 있다. 레이첼의 케이스를 보았을 때 가장 복잡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인 '사랑'조차도 느낄 수 있으며 로이 베티와 프리스(다릴 한나)의 관계 역시 애정에 기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설계자가 4년의 기한을 둔 것도 그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에 의문을 가지고 자신들의 처지와 인간의 존재에 대해 느끼게 될 어떤 감정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영화의 후반부 로이 베티가 보여주는 모습은 리플리컨트가 인간 이상의 고귀한 가치를 발현할 수 존재임을 보여준다. <블레이드 러너>는 성경을 적극적으로 레퍼런스하고 있는데 세바스찬의 아파트 건물에서 벌어지는 추격전 도중 로이가 손바닥을 뚫는 장면이나 데커드를 구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 등에 비추어보아 감독이 로이 베티를 예수와 연결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리는 빗물과 비둘기의 이미지는 마가복음 1장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 성경, 마가복음 1장
기억
레이첼이 자신이 리플리컨트가 아닌 인간임을 주장하기 위해 내세우는 것은 과거의 기억과 사진들이다. 그러나 데커드는 그 기억이 타이렐 사 회장의 조카로부터 이식된 것일 뿐임을 냉정하게 일깨워준다. 실제 기억을 가지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리플리컨트는 인간과 구별될 수 있다. 그러나 정확한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인간의 조건일까. 이식된 기억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인간의 기억은 왜곡될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데커드는 레이첼의 기억이 실제가 아니라고 단언하여 말했으나 역으로 데커드의 기억은 어떤가. 누군가 데커드의 기억이 조작된 것이라고 말한다면 데커드는 반박할 수 있을까. 기억의 실제 여부는 인간과 리플리컨트를 구분짓기에 너무 모호한 개념이다.
창조성
인공지능이 예술을 창작할 수 있을까, 혹은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을까는 오랜 논란거리 중 하나였다. 올해 개봉했던 <에이리언 - 커버넌트>에는 인공지능 데이빗(마이클 패스벤더)이 피리를 연주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또한 '신들의 발할라 입성'으로 스스로의 성공을 자축하기도 한다. <블레이드 러너>에서 리플리컨트인 레이첼은 배운 적도 없던 피아노를 절로 연주한다.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내는 선율에 당황한다. 그러나 그녀의 연주를 들은 데커드는 '아름답다'고 말한다. 기계적인 연주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누군가에게 감흥을 일으켰다면 이를 예술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게다가 리플리컨트는 감정을 발전시키는 존재이므로 단순히 악보를 연주해내는 수준을 넘어 창조성을 발현할 가능성도 충분히 열려있다. 리플리컨트 일당 중 하나인 조라는 뱀쇼를 하는 댄서이기도 하다.
<블레이드 러너>에는 여러 버전의 결말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Final Cut 버전의 엔딩은 데커드가 자신의 집에 숨어 있던 레이첼의 손을 끌고 달아나는 장면이다. <블레이드 러너>가 던져놓은 가장 논쟁적인 떡밥 중 하나는 '데카드=리플리컨트 설'이다. 영화 속 레이첼이 던졌던 "당신도 보이트-캄프 테스트를 해본 적이 있나요?"라는 질문은 강력한 여파를 남겼다. 수수께끼 같은 개프의 대사 역시 데카드가 리플리컨트임을 암시한다는 해석이 쏟아졌다. 감독은 이같은 논란을 어느정도 예상했던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데카드가 리플리컨트임을 의도했다는 인터뷰를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각본가나 배우의 이야기가 엇갈리는 것으로 보아 데카드의 정체성에 대해 정확한 합의가 있었던 것은 아닌 듯 하다.
그러나 <블레이드 러너 2049>가 개봉하고 해리슨 포드가 역시 동일한 역할(데커드)로 출연한다는 사실에서 일단 그가 리플리컨트일 가능성은 확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수명이 4년밖에 되지 않는 리플리컨트라면 1편으로부터 30년 후를 배경으로 하는 이번 영화에 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레이첼과 함께 도주한 이후 데커드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디서 무얼하며 2049년까지 생존하였는지 숨겨진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후속편의 감독은 <그을린 사랑>, <컨택트> 등을 만든 드니 뵐뇌브로, 흡인력 있는 스토리 텔링을 기대할 만 하다. 공개된 예고편에서는 <블레이드 러너> 특유의 사이버펑크적 이미지가 잘 살아 있다. R등급 영화 사상 최대의 제작비가 투입되었으며 대부분의 장면을 CG 없이 실제 촬영을 통해 구현하였다고 하니 시각적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영화관의 큰 화면으로 볼 가치가 있을 것 같다. 과연 아직 찾지 못한 질문의 답을 얻을 수 있을까. 오는 10월, 드디어 개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