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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롬 Oct 27. 2017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마음

설국과 아이리스와 안나 카레니나와 수다

나는 자주 수다스러워진다. 주로 좋은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었을 때 그렇다. 읽고 보는 게 취미이다 보니 가끔은 내 스스로가 '이야기 컬렉터'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농담이 아니라 수집하기 위해 나는 이렇게 열심히 보아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혹은 나의 부족함 때문에, 나는 자주 까먹는다. 사실상 대부분이 기억을 스쳐 사라져버린다. 심지어 정말 유명하고 정말 좋아한 작품들도 그렇다. 어떤 영화는 마지막 반전이 가장 중요한데, 분명 인상깊게 보아놓고도 그 반전이 죽어도 떠오르지 않기도 한다. 영화사에 길이 남을 작품 정도는 봐둬야지- 라면서 호기롭게 시도해보았던 작품들 역시 몇달만 지나도 명대사, 명장면, 엔딩까지 모두 쌔까맣게 잊어버리고 만다. 남는 건 흐릿한 인상 뿐이다. 어떤 분위기였어, 정도. 이럴거면 뭣하러 그렇게 시간을 투자했나 싶어 허무해진다. 조금 슬프기도 하다. 그런 일이 워낙 많다보니 뭐든 보고나면 등장인물과 결말만이라도 간단하게 기록해둬야지 매번 다짐하곤 하는데 당연히 잘 지켜지진 않는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 雪国>에서 게이샤 고마코는 열대여섯 살 무렵부터 읽은 소설들을 일기장에 일일이 기록해 두는 습관이 있다. 감상은 쓰지 않는다. 그냥 제목과 지은이, 등장인물과 그들의 관계도 정도를 적어 놓는다. 주인공 시마무라는 감상도 없이 그런 걸 기록해두는 건 헛수고가 아니냐고 묻지만 고마코는 "그래요"라며 아무렇지 않게 응수하고 넘길 뿐이다.


(<설국>을 언급할 수 있는건 내용을 기억해서가 아니라 내가 지금 이 책을 읽고 있어서다. 당연히 이 기억도 오래가진 못할거다.)



시마무라의 말처럼 헛수고일지도 모르지만 나도 고마코같은 짓을 하려 노력하고 있다. 다이어리가 불룩해지도록 포스트잇을 붙여대 보기도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혼자 남기는 메모는 재미가 없다. 영화든 소설이든 이 좋은 이야기, 재밌는 이야기를 나 혼자 삼키고 있으려니 지루한 거다. 원래 재밌는 걸 알게되면 공유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 아니겠나. 하다못해 인터넷에서 '웃짤' 하나 주워도 어디 써먹을 데 없나 고민하는게 너, 나, 우리의 본성인데.


영화나 책에 대해 글을 쓰는 이유도 사실 그래서다. 얘기하고 싶어서. 그 영화를, 그 책을 보면서 떠올렸던 생각들을 글로 정리해 얘기하고 나면 진짜 하나의 작품을 온전히 보아냈다는 느낌이 든다. 하고픈 말들을 다 쏟아내어 공개된 공간에 올리고나면 한바탕 실컷 수다떨고 난 듯 후련해진다.


가끔은 친구들에게 내용을 줄줄이 읊어주기도 한다. 그 말은 곧 들어주는 친구들이 있어야 한다는 건데, 불쌍한 나의 친구들은 심심한 내가 쏟아내는 카톡 폭탄을 감내해 주어야 한다. 최근에 본 영화나 소설 얘기를 혼자 우다다 퍼붓곤 하는데 착하고 맘 넓은 그들은 재밌게 읽었다 해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내가 추천한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진지하게 감상을 나누어 주기까지(!) 한다. 아, 이런 친구들을 뒀다니 이건 정말이지 나의 좁은 인간관계에 내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 영국 소설가이자 철학자인 데임 아이리스 머독의 인생을 다룬 <아이리스 Iris>라는 영화를 보는데, 극중 그녀의 남편이자 일평생 파트너였던 존 베일리가 친구의 장례식에서 남긴 추도사가 불쑥 마음에 와 닿았다.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것도 바로 그 추도사 때문이다. 나는 수다쟁이니까 아래에 공유한다. 좋은 이야기는 역시 여기저기 떠들고 싶어지는 법이다.

I mean, I think Anna Karenina, Tolstoy - you know, went on her way to the station to throw herself under a train, sees something funny, which she thinks to. We all do it. I do it with Iris and Janet. But then, Anna thought that she wouldn't be seeing Vronsky again because she was about to kill herself. You don't want to hear this. Janet didn't kill herself. But, but if there's one thing that would have prevented Anna from throwing herself under a train, that would be it - the thought of telling something fun to the man she loves. Well, the love is over, and the life will soon be over. That's all. Goodbye, Janet.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아시죠. 그녀는 자살을 결심하고 기차역으로 가던 중에 재밌는 일을 목격하자 애인인 브론스키가 생각납니다. 우린 다 그래요. 저도 아이리스와 자넷과 그랬죠. 그때 안나는 깨닫습니다. 다시는 브론스키를 볼 수 없다는 걸 말이죠. 이런 얘긴 듣고 싶지 않으시겠죠. 자넷은 자살한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안나가 기차에 몸을 던지는 걸 막을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건 사랑하는 사람에게 재밌는 일을 전하고 싶다는 마음일 겁니다. 사랑이 끝나면 인생도 끝납니다. 이상입니다. 잘가요, 자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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