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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롬 Sep 06. 2017

액션중심주의, 장점이자 한계

아토믹 블론드 Atomic Blonde(2017)

여름의 끝자락으로 다가가는 시점에 마지막 열기를 붙잡아 보려는 듯 액션 영화들이 줄줄이 개봉했다. <아토믹 블론드 Atomic Blonde>도 그 중 하나다. 감독인 데이빗 레이치는 <존 윅> 시리즈로 액션 영화 마니아들에게 이름을 각인시켰고, 이후 예상을 깨고 세계적인 흥행에 성공한 <데드풀>의 후속 감독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아토믹 블론드>의 평이 나쁘지 않고 일단은 손익분기도 이미 넘긴 상태이니 <데드풀2>만 잘 된다면 할리우드에서 확실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존 윅'과 '아토믹 블론드'


<존 윅> 시리즈를 챙겨 보았다면 알겠지만 이 감독은 선택과 집중이 확실하다. 그에게 '액션영화'란 말 그대로 화려한 액션을 스타일리시하게 연출하여 전달하는 영화다. 그 외는 모두 부가적인 것일 뿐이다. 심지어 스토리마저도.



많은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들이 취약한 스토리로 비판받곤 하지만 <존 윅>에는 그런 비판이 어울리지 않는다. 애초에 스토리랄 게 없기도 하고, 개연성같은 건 신경쓰지 않겠다는 태도를 영화 내내 명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주인공 존 윅(키아누 리브스)은 키우던 반려 비글 데이지가 죽자 복수를 위해 범인을 찾아 나선다. 이게 스토리의 전부다. 개연성(蓋然性)은 없으나 '개()'연성은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했는데 이 말이 마냥 농담은 아니다. 어찌 되었든 영화 내내 화려하면서도 처절한 액션씬이 이어지고 액션의 생동성으로만 본다면 분명 상당한 감흥 전달에 성공하니 애초의 목적만큼은 정확히 달성한 셈이다.


<아토믹 블론드>를 두고 <존 윅>의 여성판이라고 얘기하는 것 역시 감독의 그러한 특성이 그대로 묻어나기 때문이다. 존 윅과 비교하자면 플롯이 좀 복잡해졌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중요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오직 액션만이 중요하다


영화의 배경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의 1989년. 영국 M16 소속인 로레인 브로튼(샤를리즈 테론)은 전세계 스파이 명단을 훔쳐 달아난 이중 스파이를 추적하기 위해 베를린에 파견되어 지역 지부장인 데이빗 퍼시벌(제임스 맥어보이)과 접선한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로레인은 자신의 몸 하나만 믿고 수사를 시작한다.


배경을 80년대의 베를린으로 설정한 것은 스파이 액션을 보여줄 판을 깔기 위한 설정에 불과하다. 사실 영화는 상당히 현대적이라 의식하지 않고 보면 80년대가 배경이라는 것이 그다지 와닿지 않기도 한다. 로레인이 머무는 호텔의 내부는 미래적인 분위기까지 풍기며, 등장 인물들이 입는 의상도 무척 세련되다. 사실 그 얼굴, 그 몸매에 그렇게 화려하게 차려입기까지 하면서 어떻게 비밀스러운 임무를 수행하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어차피 이해할 필요도 없다. 우리 모두가 알지 않나. 이 영화의 목적은 멋들어진 비주얼로 화끈한 액션을 보여주는 것 뿐이다. 스토리의 개연성, 주인공 행동의 정당성, 섬세한 역사적 고증같은 건 목적 달성의 걸림돌이다. 그냥 그러려니 납득하면 된다.



사실 앞서 말했듯 <아토믹 블론드>는 <존 윅>보다 스토리에 힘을 주고 있는 편이긴 하다. <존 윅>이 직선적인 복수극이었다면 <아토믹 블론드>는 '이중 스파이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놓고 이를 추적해가는 형식을 취한다. 영화는 심지어 액자식 구성으로, 취조실의 로레인이 사건의 전말에 대해 증언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굳이 이런 형식을 빌려온 것은 후반부 반전을 강화하기 위해서일텐데 안타깝게도 이 반전은 특별히 효과적이진 않다. 외려 스토리를 번잡스럽게 만든다는 느낌이다. 이 감독에겐 <존 윅>처럼 단선적인 스토리가 더 잘 맞는 것 같다.


부가적인 이야기는 그만두고 핵심인 액션을 이야기하자면, 이 부분에서만큼은 분명히 실망시키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차별성은 당연히 여성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다는 점이다. 액션은 인간이 가진 육체성을 극대화한 장르이기에 이 장르에서는 영화가 '몸'을 어떻게 다루고 있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일반의 남성 중심 액션 영화에서 여성의 몸이 다루어져 온 방식을 비교해본다면 이 영화의 시선이 의미있게 다가온다.


샤를리즈 테론은 긴 신장과 늘씬한 몸을 가진 할리우드의 대표 섹시 스타이다. 그녀의 신체 조건은 그 자체로 훌륭한 액션의 원료이기에 영화는 그를 잘 써먹으려 노력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우리는 이미 샤를리즈 테론의 전라를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봐온 매끈하게 잘 다듬어진 몸이 아니다. 그렇다고 헬스장 전단지에서 볼 법한 근육질 몸매와도 다르다. 대개 여성의 몸은 곡선의 아름다움으로 표현되지만 로레인의 몸에서 느껴지는 것은 직선의 강인함이다. 온통 상처 투성이인 몸은 성한 곳 하나 없다. 인위적인 운동보다는 실제의 거친 현장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단련해 왔다는 느낌을 풍긴다. 내로라는 섹시 스타가 전라의 뒷태를 보여주는데 성적인 뉘앙스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녀가 남성적이고 터프한, 전통적 전사 캐릭터인 것도 아니다. 백금발에 선글라스, 무엇보다 아찔한 킬힐을 고수하기에 이 캐릭터는 더 멋있다.



<아토믹 블론드>가 지향한 바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엔 당연히 배우의 몫이 크다. 샤를리즈 테론은 장면 장면을 장악할 줄 안다. 특히 이전작인 <매드맥스>에서 보여준 강인한 전사 캐릭터를 아직 잊지 못한 관객들에게 그녀의 존재가 주는 위압적인 느낌이 여전히 남아있다. 샤를리즈 테론의 존재감이 아니었다면 이 영화의 엉성한 줄기들이 훨씬 노골적으로 노출되었을 것이다.


로레인의 액션은 그녀가 가진 아름다운 몸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길쭉길쭉하게 뻗은 팔 다리를 과시적으로 내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액션은 그야말로 온 몸으로 맞부딪히는 방식이다. 특히 후반부 계단에서부터 시작되는 롱테이크 액션씬이 전달하는 현실감 앞에서는 입이 떡 벌어질 수 밖에 없다. (사실 이 영화는 전체보다 부분이 큰 영화다. 이 장면만 챙겨 보아도 영화 전체를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한계가 명확하다


극의 또다른 한 축을 담당하는 것은 데이빗 퍼시벌 캐릭터다. 이 역을 맡은 배우 제임스 맥어보이가 최근 영화들에서 보여주고 있는 연기 스타일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떠올리게 한다. 극적인 상황에서 연기에 액센트를 주는 방식이 비슷하다. 한때 로맨스에 가장 적합한 얼굴을 가졌던 이 배우는 최근으로 올수록 남성적이고 선 굵은 캐릭터를 주로 선택하며 이미지 반전에 성공했다. <아토믹 블론드>에서 역시 비열한 면모를 지닌 캐릭터를 힘주어 연기하며 극의 균형을 이루는데, 으레 1인 액션 영화에서 주인공이 아닌 캐릭터들이 그렇듯 특별히 깊은 인상을 남기지는 못한다. (플롯상에서는 중요한 인물이지만 이 영화가 플롯이 중요한 작품이 아니란 점에서도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킹스맨>을 통해 여성 액션 스타로 급부상한 소피아 부텔라가 맡은 델핀 캐릭터 역시 평범하게 소모되고 마는데, 무려 소피아 부텔라를 캐스팅했음에도 그녀에게 제대로 된 액션씬 하나 배당되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움을 남긴다.



<아토믹 블론드>는 장점이 명확한 만큼 한계도 분명한 영화다. 어느 쪽에 중점을 두고 영화를 관람하느냐에 따라 반응이 갈라질 공산이 크다. 나의 경우를 얘기하자면 앞서 언급한 롱테이크 액션씬을 제외하면 큰 재미를 느끼지는 못했다. 사실 중반부는 느슨하고 지루하게까지 느껴졌다. 다만 후반부만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감상했는데, 걸출한 액션씬에 이어 막판엔 반전에 반전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기 때문이다. 반전의 내용 자체보다 휘몰아치듯 정신없는 마무리여서 어쩐지 정신을 차리고 따라갈 수 밖에 없어졌다. 게다가 영화 내내 흐르는 80년대 히트곡 퍼레이드도 정신을 빼놓는데 한 몫 한다.(이 영화의 마지막에 연달아 나오는 음악은 무려 The Clash의 London CallingQueen의 Under Pressure다. 이 두 곡만 해도 사용권이 꽤나 비쌌을 테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겐 의미있는 영화일 거라 생각한다. 대중 영화계에 이렇게 자신의 몸을 마구 다쳐가며 싸우는 여성 액션씬은 여전히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영화 역사 100여 년이 지난 요즘에서야 여성 주인공을 제대로 중심에 세운 액션 영화들이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다는 게 새삼 놀랍다. 물론 이전에도 '여전사' 캐릭터는 있었지만 이들 캐릭터는 대개 남성성을 최대한 부각하는 방식으로 그려지곤 했다. 그러니 이 영화에 조금 미흡한 면이 있더라도 호응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일단 풀이 넓어져야 그 안에서 비교를 해도 하지 않겠나. 그리하여 나의 선택은 어찌 되었든 관람을 통해 작은 응원을 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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