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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롬 Oct 10. 2017

여전히 아슬아슬한 칼날 위에서

블레이드 러너 2049/Blade Runner 2049(2017)

※스포일러 포함

줄거리 :

블레이드 러너 데커드(해리슨 포드)가 리플리컨트인 레이첼(숀 영)과 사랑에 빠져 도망친 이후 30년의 세월이 흐른다. 2049년의 LA에는 여전히 음울한 빗방울이 떨어지고 도시에는 잿빛의 그늘이 드리워있다. 타이렐사(최초 리플리컨트를 만들어 낸 기업)의 파산 이후 리플리컨트 제작 기술은 니안더 월레스(자레드 레토)의 손에 들어간다. 월레스는 계속해서 개량 모델을 개발해내며 우주 식민지 개척에 앞장선다.

순종적으로 개량된 신모델 리플리컨트인 K(라이언 고슬링)는 LAPD 소속으로 과거 타이렐사가 개발했던 구모델(주로 넥서스 8 모델. 이들은 4년의 수명 제한이 있었던 넥서스 6 모델의 개량형으로 수명 제한이 없다.)의 제거를 목적으로 하는 블레이드 러너다. 질서 유지를 최우선 과제로 삼는 상사 조시(로빈 라이트)의 명령에 따라 K는 월레스 사의 합성 농지에서 일하고 있던 넥서스 8 모델 사퍼 모튼을 찾아간다. 결투 끝에 사퍼 모튼을 사살하고 증거를 수집하는 와중에 그는 이미 오래 전 죽은 하얀 나무 아래서 누군가의 유골을 발견하게 된다. 검사 결과 타이렐사의 프로토타입 리플리컨트였던 레이첼이 그 유골의 주인공이며 믿을 수 없게도 출산 중 사망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출산이 불가능한 리플리컨트의 몸에서 새 생명이 탄생하였음을 알게 된 조시는 사회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K에게 탄생한 아이와 관련된 증거들을 모두 찾아 말살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K는 사라진 아이를 쫓아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극심한 혼란을 느끼기 시작한다.

한편 니안더 월레스는 우주 식민지 개척을 위해 더 많은 리플리컨트의 생산이 필요해지고 단순 제작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는다. 그는 리플리컨트 스스로 새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는 기술(즉 생식능력을 탑재한 리플리컨트)을 개발하고자 하나 번번히 실패한다. 그러던 와중 레이첼의 유골을 통해 신기술 개발의 힌트를 얻게 된 월레스는 궁극적인 기술의 완성을 위해 마지막 열쇠를 찾아 나선다.

섬세하고 영리한 후속작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이미 클래식의 반열에 오른 작품의 후속이라는 거대한 부담을 매우 훌륭하게 돌파한 작품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원작에 대한 경의를 잊지 않으면서도 스스로가 지향한 바를 정확히 달성한다.


82년도의 <블레이드 러너>가 현재와 같은 지위에 오르게 된 것은 첫째, 세월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 인간에 대한 철학적 질문이 있었기 때문이며 둘째, 디스토피아적 미래상에 대한 아름다우면서도 충격적인 비주얼을 제시하였기 때문이었다. <2049>는 그 철학적 질문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한층 깊이를 더하고, 원작의 사이버펑크적 이미지의 연상선 아래 영리한 상상력을 가미하여 쉬이 잊히지 않을 독창적인 이미지를 창조하는 데 성공한다.


<2049>에는 원작에 대한 오마주가 가득하기에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전작 관람이 필히 선행되어야 한다. 일단 줄거리의 맥부터가 전작과 같다고 할 수 있다. 82년도의 <블레이드 러너>는 크게 두 줄기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었다.

1) 블레이드 러너 데커드(해리슨 포드)가 지구에 잠입하여 숨어든 넥서스 6 모델 리플리컨트의 뒤를 쫓는다.

2) 탈출한 리플리컨트들이 우두머리 로이 베티(룻거 하우어)를 주축으로 하여 자신들의 창조주를 찾아나선다.


<2049>의 주인공 K는 전작의 데커드(블레이드 러너)와 로이 베티(리플리컨트)의 특성을 모두 이어 받은 캐릭터다. K는 블레이드 러너이자 그 자신이 리플리컨트이기도 하다. 그는 전작의 데커드가 그랬듯 리플리컨트들을 추적하는 동시에, 로이 베티가 그랬듯 자신을 창조한 자를 찾아 나서게 된다.



전체적인 스토리의 전개 뿐만 아니다. 전작의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형성했던 동물 모양 종이 접기가 2049에서는 동물 목각 인형으로 변형되어 중요한 소재가 되고, 데커드와 레이첼 사이에 감상적인 분위기를 형성했던 피아노가 역시 증거 발견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리플리컨트를 인간과 구별하는 방식으로 등장했던 보이트 캄프 테스트가 베이스라인 테스트로 변형되어 등장하기도 한다. 이처럼 2049는 원작의 흥미로운 요소들을 끌고 들어와 창의적인 방식으로 재활용하며 스토리를 전개시켜 간다.


결말 역시 전작과 동일하다. 로이 베티가 데커드를 살리고 죽음을 맞았듯 K 역시 데커드를 구하고 죽음을 맞는다. 전작의 마지막에 데커드는 연인 레이첼을 만나 떠나고, 2049의 마지막은 데커드가 자신의 친딸을 마주하는 장면이다.


<블레이드 러너><블레이드 러너 2049>의 관계를 비유하자면 부모와 자식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유전자는 다르지만 핵심적인 유전 정보를 고스란히 물려주고 받은 영화인 것이다. 블레이드 러너 시리즈의 핵심이 창조와 피창조의 관계성 안에 있다는 것을 상기해본다면 두 영화의 연결점 역시 흥미롭다.


죽은 나무, 노란 꽃


영화 초반부 등장하는 '죽은 나무'의 뿌리는 레이첼의 유골과 닿아 있다. 이 나무는 출산 과정에서 새 생명을 탄생시키고 죽음을 맞이한 레이첼을 상징한다. 그 아래 바쳐진 노란 빛의 꽃 송이는 부모의 그늘 아래 태어난 자식이라 할 수 있다. 생명력을 잃은 푸른 빛 시린 화면들 속에 유독 눈에 띠는 이 샛노란 꽃에서는 어두운 도시와 어울리지 않는 생기가 느껴진다. 비록 대지에 뿌리를 박고 자라난 꽃은 아니지만 여전히 생생한 기운을 간직한 꽃송이는 가녀리지만 여전히 숨 쉬고 있는 생명의 희망을 보게 한다.



이 꽃은 데커드와 레이첼 사이에서 태어난 기적같은 생명 아나 스텔라인(카를라 주리) 박사와 연결지을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나무 아래 놓여진 꽃은 두 갈래로 나뉘어 있다. 그렇다면 나머지 한 갈래에서 핀 꽃 한 송이는 아나와 같은 유전자, 같은 기억을 공유한 K의 것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데커드를 찾아 나서는 길에 마주한 벌떼들이 K의 손에 달라 붙는 장면을 통해 K와 꽃의 연결성이 한번 더 공고해 진다. 즉 감독은 아나 뿐만 아니라 K 역시 그와 동일한 기적의 생명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더 어려워진 질문들


전작에 등장하지 않았던 새로운 종류의 인공지능 조이(Joi, 아나 디 아르마스)는 이야기에 또다른 층을 부과하는 역할을 한다. 조이는 영화 <그녀 Her>의 인공지능 사만다(목소리 : 스칼렛 요한슨)에 전자적 육체 이미지를 부여했다고 볼 수 있는 캐릭터다. 역시 월레스사가 개발한 제품 중 하나로 인공지능의 감정적 공감 기능을 극대화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조이는 K의 유일한 친구이자 연인이다. 자존감이 결여되어 있던 K는 그녀를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할 수 있게 된다. 조이는 K가 특별하다 말해주는 유일한 인물이지만 정작 그녀는 0과 1로 프로그래밍된 기계일 뿐이다. 조이는 인간과 리플리컨트라는 두 계층으로 이뤄진 사회의 또다른 밑바닥에 존재한다. 리플리컨트의 해방을 이야기하는 마리에트조차도 조이를 무시하며("네 안에 들어가 봤어. 별 거 없더라.") 조이는 결국 리플리컨트인 러브의 발 아래 처참하게 사라진다. 그럼에도 조이는 진심으로 K를 걱정하고 자신에게 닥칠 위험을 무릅쓰고 K와 함께하길 선택하며, K 역시 그녀에게만큼은 거짓없는 진심을 보이며 애정을 가진다.(6개 문자로 이루어진 DNA보다 0과 1로 이루어진 조이가 더 우아하다 표현하기도 한다.)



K-조이의 관계는 전편에서의 데커드-레이첼과 유사하다. 인공지능인 조이의 존재는 전작이 던졌던 질문의 범위를 확장하는 역할을 한다. 인간과 동일한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는 인조 인간(리플리컨트)에 대한 질문은 30여 년이 지난 현대에 와서 조이와 같이 이성과 감성을 겸비한 인공 지능을 인격체로 보아야 하는가의 물음으로 한층 더 복잡하고 심오해 진다.


전작에서 또 하나 확장된 질문은 인간의 감정에 대한 것이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인간, 즉 리플리컨트에 대한 질문을 넘어서 인공적으로 조작된 감정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에 대해 물음을 제시하고 있다. 니안더 월레스는 데커드가 첫눈에 레이첼에 반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고 밝힌다. 실제로 데커드는 레이첼과 사랑에 빠진다. 그렇다면 이것은 진짜 사랑인가 혹은 수학적 정밀함인가. 이 질문은 곧 조이의 존재와도 맞닿아 있다. 조이가 K에게 보이는 사랑의 감정은 진심을 담은 감정인 것일까 혹은 단순히 0과 1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의 작용으로 보아야 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과연 사랑이란 무엇인가'란 더 어려운 질문에 먼저 답해야만 한다.


'K'가 '조'가 되는 이야기


<블레이드 러너 2049><블레이드 러너>가 그랬듯 성경에 대한 레퍼런스를 비롯하여 다양한 이미지와 설정을 배치하며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물론 답은 알려주지 않는다. 주인공인 K는 월레스 사에 순종하지도, 프레이자를 필두로 한 리플리컨트 혁명 조직에 가담하지도 않고 그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데커드를 구해낸 뒤 최후를 맞이한다. 이 선택은 그가 내린 가장 인간적인 결정이다.


월레스의 야망과 프레이자의 혁명 이야기를 영화의 클라이막스로 설정하지 않은 것은 이 영화가 지향하는 바를 명확히 보여준다.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K(혹은 조)의 서사에만 집중하고 있다. 이 영화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인간과 리플리컨트 간의 권력 전쟁이 아닌 한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서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K의 서사가 전쟁의 스펙타클 속에 매몰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영화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전작의 존재를 비롯하여 여러 면에서 보아내기 쉽지 않은 영화다. 이 영화는 분명 어렵다. 그러나 그렇기에 다시 보고 싶은 영화이기도 하다. 볼수록 새로운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 영화이며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게 만드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영상도 이야기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쓸쓸하고 아름답다. 누군가에겐 그 어떤 작품보다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영화임을 확신하는 이유다.


모두가 칼날 위를 달리고 있다.
실체와 허상, 인간과 비(非)인간의 경계는
여전히 이토록 아슬아슬하다.




+ K가 숨겨진 (일종의)가족사를 추적해가는 이야기에서 드니 뵐뇌브 감독의 전작 <그을린 사랑>이 떠오르기도 한다. 드니 뵐뇌브는 <컨택트>를 통해 SF 장르에서의 지적 재능을 제대로 발휘했던 감독이기도 하니 이 부담스러우면서도 영광스러운 후속작 감독을 맡기에 최적이었던 게 틀림없다. 그는 한 영화 안에 이성과 감성을 모두 훌륭하게 담아낼 수 있는 몇 안되는 감독이다. 올해 가장 기대하고 있었던 이 작품의 감독을 그가 맡아주어 행복했다. 이 작품을 극장에서 보고 나니 이제 진짜 한 해가 마무리되어가는 시점이라는 것이 와닿아 어쩐지 기분이 묘해졌다. 벌써 내년의 기대작을 찾아봐야 할 시점이 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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