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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롬 Oct 31. 2017

뒤처진 히어로들의 유쾌한 난장

토르 : 라그나로크 Thor : Ragnarok(2017)

당신이 제작자라 생각해보자. 토르는 의외로 풀어내기 어려운 미션이다. 캐릭터가 매력이 없어서? 아니, 무려 북유럽 신화에서 따온 천둥의 신이다. 감히 인간계가 넘볼 수 없는 어마어마한 파워에 잘생긴 외모까지 갖췄다. 아, 맡을 배우를 찾기 힘든걸까? 다행히도 크리스 헴스워스라는 더 이상 적합할 수 없는 배우를 발견했다. 그 얼굴에 그 피지컬이라면 '갓'이라는 호칭도 낯간지럽지 않을 것 같다. 부족한 건 사연일까? 아무리 잘나도 스토리가 빈약하면 통하기 힘드니까. 그러나 8살 무렵부터 자기를 죽이겠다고 칼을 품고 다가오는 놈을 동생으로 둔 복잡다단한 가정사를 떠올려본다면 그렇지도 않다. 게다가 동생만 문제인가 했더니 숨겨진 누나까지 한 성깔하신다. 이렇게 사연 많은 집안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문제는 이 캐릭터가 지닌 내적 특성에서 기인한다. 왕족 가문의 순수 혈통, 타고나기를 잘난 외모, 남 부러울 것 없는 신체 능력. 토르는 열등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캐릭터다. 아마 자라면서 사랑도 듬뿍 받았던지 구김살도 없다. 기본적으로 단순한 타입이기도 해 어떤 상황에서든 토르는 긍정적이다. 순수와 낙천으로 무장한 토르의 ‘근육 바보’ 캐릭터는 코미디용으로 분명 나쁘지 않다.



그러나 토르는 트릴로지 시리즈로 이어지는 거대 서사를 이끌어야 할 주인공 아닌가. 관객들은 기본적으로 고난과 시련의 상황 속에 괴로워하고 고민하는 주인공을 보며 감정을 이입하고 이 과정을 통해 캐릭터에 대한 애정을 형성한다. 아이언맨이 시니컬한 성격으로 페퍼나 주변 인물들과 갈등을 빚지 않았다면, 배트맨이 사회 정의와 사적인 감정 사이에서 괴로워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들을 이만큼 사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토르는 너무 안정적인 캐릭터다. 웬만큼 어려운 상황에 밀어넣는 것으로는 이 캐릭터를 동요시킬 수 없다. 양친이 다 돌아가셔도, 동생이 죽어도(정확히는 죽은 줄 알았어도), 죽고 못살던 애인과 헤어졌어도 토르는 흔들림이 없다. 슬퍼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다. 그런 고난의 상황들이 이 캐릭터에 특별한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벤져스 원년 멤버이면서도 토르 시리즈가 유독 힘을 얻지 못했던 것은 그래서다. 이 시리즈의 정서적 동력은 크게 두 개 축에 의존하고 있는데 하나는 인간인 제인과의 연애사, 또 다른 하나는 동생인 로키와의 애증사다. 아쉽게도 두 쪽 다 그다지 강력한 감정은 아니다.(제인이나 로키가 사라진다고 가정해보자. 토르가 크게 영향을 받을까? 아니다. 실제로 3편에서 제인과의 결별은 농담처럼 한 번 언급되고 지나가고, 로키의 죽은 척 역시 특별한 후유증을 남긴 것 같진 않다.) 그나마도 후자는 토르 본인보다는 로키가 지닌 열등감에 상당 부분 빚지고 있다. 이렇게 부족한 감정적 깊이를 영화는 코미디로 메워낼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토르를 나름대로 애정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의 절반은 크리스 헴스워스라는 배우를 개인적으로 좋아해서였고, 나머지 절반은 안쓰러워서였다. 어영부영 1, 2편이 지나가고 벌써 트릴로지의 마지막이다. 분명 고민이 많았을것이다. 어벤져스 원년 멤버 뿐만 아니라 속속 선보이고 있는 신규 캐릭터까지 나름대로 개성을 확립하고 기반을 닦아가고 있는 가운데 여전히 이렇다 할 뭔가를 보여주지 못한 토르는 괜스레 마음이 가는 시리즈였다. 그러면서도 기대를 갖긴 힘들었다. 올해 라그나로크가 개봉할 것이란 소식은 들었지만 이내 잊어버렸을 정도로. 그리고 바로 그랬기에 <토르 : 라그나로크>가 더 감격스러웠던 것이다.

 



<라그나로크>는 절대 잘 만든 영화가 아니다. 그다지 신선한 시도도 아니고 스토리에 깊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는 이전과는 다른 활력이 흐른다.



<라그나로크>는 다양한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감옥같은 공간에 갇혀있던 이들이 팀업을 하여 탈출하는 스토리는 배경이 우주라는 것까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연상시키고, 사카아르 행성에서 벌어지는 챔피언전은 분위기는 정반대일지언정 당연히 <글래디에이터>와 닮아있다.


무엇보다 가장 비슷한 영화는 <아이언맨3>이다. 두 이야기의 서사 구조를 비교해보자. 아이언 수트를 잃고 자괴감에 빠졌던 토니 스타크가 자신의 진짜 힘은 수트가 아닌 공학자라는 아이덴티티에 있음을 깨닫는다. 묠니르가 부서지고 자신감을 잃었던 토르가 자신의 진짜 힘은 천둥을 다루는 신이라는 아이덴티티에 있음을 깨닫는다. 심지어 엔딩도 비슷하다. 토니는 아이언 수트를 모두 폭파시키며 이전의 자신에 안녕을 고하고 토르는 스스로 아스가르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떠난다.


<아이언맨3>의 성장 서사는 관객들에게 이미 익숙하지만 그럼에도 성공적인 이야기가 가진 힘은 여전하다. 토르 캐릭터가 이전과 달리 극의 중심으로 분명한 역할을 해낼 수 있었던 것 역시 그의 성장과 각성이 감정적으로 부족했던 깊이를 보완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뒤끝없고 해맑지만 <라크나로크>의 토르는 장난질 하는 로키를 한발짝 앞서볼 수 있게 되었으며 대단히 영리한 방식은 아닐지언정 헐크와 배너 박사를 오가며 비위를 살살 맞춰줄 줄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에게 책임감이 생겼다. 왕의 자리를 일부러 거부하며 바깥으로만 돌던 토르는 드디어 자신이 아스가르드의 백성들을 이끌어야 할 하나 뿐인 리더임을 자각한다. 항상 어리고 소년같아 보이기만 했던 토르가 엔딩에 이르러 백성들 사이를 뚫고 나와 왕좌(여기서는 함장의 자리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지만)에 앉을 때, 이상하게 벅찬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제서야 '토르'라는 이야기가 제대로 시작되었다는 인상까지 준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띠는 장점은 성별과 인종을 '편안하게' 다양화시켰다는 측면이다. <라그나로크>는 그 캐릭터가 여성이고, 비백인이라는 점에 악센트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캐릭터를 대우한다. 억지 러브라인이 없는 것 역시 '남성'과 '여성'이라는 특성으로만 캐릭터를 파악하지 않았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주요 캐릭터가 애초부터 백인 남성에 치우쳐있기에 가지는 태생적 한계는 있지만 이렇게 불편함 없이 유쾌하게 볼 수 있는 영화는 분명 드물다.


테사 톰프슨의 발키리 캐릭터도 좋지만 케이트 블란쳇은 꼭 따로 언급해야 할 것 같다. 마블 사상 첫 여성 빌런으로 주목받은 헬라(케이트 블란쳇) 캐릭터는 감사한 마음이 들 정도로 인상적이다. 여기엔 단연 배우의 몫이 큰데, 헬라의 서사가 영화 속에서 대단히 책임감있게 구현되진 않았음에도 케이트 블란쳇은 처음 등장하는 걸음걸이, 옆으로 손목을 돌리는 우아한 손짓, 미묘하게 까닥하는 고개의 움직임, 그리고 온도와 무게를  동시에 지닌 특유의 목소리만으로 헬라가 어떤 캐릭터인지 완벽하게 설명해낸다. 배우 한 사람이 영화의 격을 한 단계 높일 수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다.





아무리 추켜세우려 해도 <토르 : 라그나로크>가 대단한 작품이라 말하긴 힘들 것이다. 사랑받지 못하고 버려진 것들이 모이는 행성이라던가, 역사 속에서 추악했던 과거를 덮어버리는 지배자의 태도 등 <나로크>엔 분명 더 잘 써먹을 수 있을 좋은 이야깃거리들이 있었음에도 그를 충분히 잘 활용하지 못했고, 의도적이었던 것 같지만 앞선 1, 2편과 트릴로지로써 연결되는 공통의 맥은 상당부분 끊어져 있으며, 영화의 개그들은 대부분 재밌지만 분명 과한 지점들도 있다.


그럼에도 <토르 : 라그나로크>는 괜찮은 오락 영화이며, 드디어 토르라는 캐릭터에 애정을 가지는 데 성공하게 하는 영화다. 솔직히 말해 나는 <라그나로크>가 흥행과 비평에 있어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걸 보며 괜히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사실 이 영화의 주축을 이루는 토르와 헐크는 원년 어벤져스 멤버 중 조금 뒤쳐지는 축 아니었나. 토르 시리즈는 다른 히어로에 비해 아쉬운 성적을 보였고, 헐크는 별도의 솔로 무비를 가지지도 못했다. 존재감이 아쉬웠던 그들이 뭉쳐 저 우주 공간에서 시끌벅적 한바탕 난장을 벌였다는게 괜히 유쾌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행복한 토르의 줏대있는 낙천성이 드디어 나를 설득시킨걸까. 괜스레 트집잡는 말로 훼방놓고 싶지 않아졌다. 나는 분명 이 영화를 행복하게 봤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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