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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롬 Jun 12. 2018

여기, 존재하고 있다.

버닝 Burning(2018)

1.

이창독 감독의 작품은 자주 문학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실제로 그의 영화를 보다보면 마치 잘 쓰여진 소설책 한권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혹자는 비판적 의미로 ‘문학적’이란 말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정작 본인은 아랑곳하지 않는 듯 싶다. 전작은 아예 ‘시’를 소재로 한, 제목마저 ‘시’인 영화였으니까.


2.

<버닝> 역시 문학적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하고 있기도 하고(이 영화는 애초에 NHK의 프로젝트로 시작되었다), 작중에서 언급되는 작가 윌리엄 포크너의 <헛간방화>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무엇보다 메타포로 가득한 대사들이 문학적이다. 그리고 나는 이 문학적인 특성이 단점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문학이 가진 장점을 영화적으로 훌륭하게 표현해낼 수 있다는 건 분명 대단한 장점이니까.


여담으로 하루키의 단편을 읽어본 결과 생각보다 훨씬 원작에 충실한 영화였다. 원작에서 제시한 모티프를 거의 모두 활용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원작이 단편이니만큼 상세한 세부 설정과 스토리를 추가했으며, 하루키의 작품에 비해 미스터리 스릴러 분위기도 강화되었다.



3.

극 중에서 대립하는 두 남자는 현대 한국사회 젊은이의 상반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한쪽이 무력감에 허덕인다면 다른 한쪽은 권태에 지루해한다. 물려받은 것이라고는 가난과 송아지 한 마리 밖에 없는 종수(유아인)는 시종 무기력한 얼굴로 스크린을 배회한다. 문예창작과를 나온 뒤 취업은 안되고 작가라기엔 제대로 써놓은 글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가 구직을 위한 노력도, 글을 쓰려는 노력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종수에겐 무언가 성취할 수 있다는 기대가 전혀 없다. 애써보아도 어차피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면 그는 차라리 아무 것도 하지 않기를 선택한 사람이다.


한편 여유로운 집안 환경에서 젊은 나이에 이미 세습된 부를 누리는 벤(연상엽)이 겪고 있는 것은 권태이다. 두 인물은 양 극단에 있는 듯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맞닿아 있기도 한데, 벤 역시 어떤 것도 이루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의 경우엔 굳이 이루어야 할 것이 없기 때문이란 점이 다르다. 벤은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기에 노력해야 할 이유가 없고, 그 때문에 권태를 느낀다. (무심한 얼굴로 하는 하품이 그가 느끼는 권태를 상징한다.) 이 권태를 이겨내기 위해 벤은 두 가지 소소한 장난을 즐기는데 하나는 자신과는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젊은 여성(해미)들과의 짧은 만남이고 다른 하나는 버려진 비닐 하우스를 불태우는 행위다. 서로 겹쳐지는 이 두 가지 장난은 일면 실제적이면서 동시에 메타포이기도 하여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한다.



4.

이 영화의 결말은 어떤 식으로 해석해도 나름의 정당성이 있다. 우선 해미가 실제로 죽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종수의 예상대로 벤이 해미를 살해했을 지도 모른다. 해미의 자살 가능성도 간과할 수 없다. 해미가 평소 '사라지고 싶으나 용기가 없다'라고 말했던 것을 되새겨 본다면 벤이 일방적으로 해미를 살해한 것이 아니라 해미가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일 수도 있다. 물론 해미가 죽었다는 것은 종수의 심증일 뿐 구체적인 물증이 없으니 그저 어딘가 훌쩍 떠나버린 걸지도 모른다.



5.

또다른 흥미로운 해석은 종수가 글을 쓰기 시작한 장면이 기점이 된다. 조금 뜬금없어 보이는 이 장면이 삽입되며 영화는 조금 더 다층적인 구조를 갖게 된다. 일각의 해석처럼 어느 시점부터, 혹은 영화 전체가 종수의 소설 속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종수가 왜 글을 쓰게 되었냐다. 쓰고 싶은 이야기를 찾지 못하고 있던 종수는 해미의 실종에 비로소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것만이 마치 원래 없었던 것 마냥 사라져버린 해미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버닝>은 계속해서 존재와 비존재를 두고 미스터리를 만든다. 해미는 고양이가 있다고 주장하고, 우물에 빠졌었다 이야기하지만 누군가는 고양이도 우물도 원래 없었다고 반박한다. 만약 고양이와 우물이 존재한다고, 존재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해미가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비닐하우스가 타버리고, 해미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고 원래부터 없었던 것이 되어선 안된다. 쓸모없고 보기 흉하더라도, 사회에 겉돌고 세상에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더라도 그들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워진다면 또다른 모습의 비닐하우스이자 해미인 종수 역시 지워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결국 이야기하기를 선택한다. 자신같은 사람들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우리는 여기 살아있다고, 그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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