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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롬 Mar 05. 2019

제 91회 아마데미 작품상 후보 감상록

오스카 시즌을 떠나보내며

지난주에 열린 제 91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수상 결과는 꽤 많은 이변이 있었다. 납득하기 어려운 아카데미 회원들의 선택에 대한 찜찜함이 크긴 하지만, 어쨌든 관객의 입장에선 이 시즌을 맞아 조금 더 다채로운 작품들을 챙겨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점에선 여전히 오스카가 가진 의의가 있는 것 같다.


작품상 후보 8편 중 4월 개봉을 앞둔 <바이스>를 제외한 7편을 본 시점에서 올해 아카데미의 후보군에는 일단 고개가 갸웃해지긴 한다. 언제나 아카데미의 안목에는 의문이 남았었지만 올해는 유독 평이한 작품들이 이름을 올렸다. 개인적으론 <로마>, <더 페이버릿> 정도를 제외한다면 과연 이후에도 기억에 남을만한 작품이 있긴 할까 싶다. 그럼에도 어쨌든, 작품상 레이스를 달린 영화들에 대해선 짧게나마 감상 기록을 남겨두려 한다. 내년엔 좀더 알찬 라인업이길 기대하면서.


1. 블랙팬서

마블 프랜차이즈의 작품상 후보 지명은 상당히 흥미롭다. 같은 세계관을 공유한 수많은 작품들 중 블랙팬서만이 이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이 암시하는 바는 명확해 보인다. 오스카는 작품 내적 완성도 뿐만 아니라 외적 이슈의 영향도 크게 작용하는 시상식이란 점이다. <블랙팬서>나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같은 영화의 성공은 소재 고갈을 호소해 온 할리우드가 파고들만한 거대한 미답지가 여전히 남아있으며, 심지어 그것이 시장에서도 매력적으로 작용함을 반증한다는 측면에서 무척 중요하다. 대형 프랜차이즈의 이러한 발자취는 분명 의미가 있고, 그렇기에 블랙팬서가 작품상 후보로 지정된 것에 크게 이의를 제기하고 싶진 않다. 다만 작품 자체의 완성도만 고려한다면 역시 좀 아쉬움이 남는다는 사실은 숨길 수 없을 것 같다.


2. 블랙클랜스맨

스파이크 리 감독의 이 작품은 극장 개봉없이 iptv로 직행하며 한국에서 상당히 홀대 당했지만, 작품성은 논외로 치고 단순히 재미의 측면만으로도 꽤나 추천할 만한 작품이다. 기본적으로 잠복 수사물이기 때문에 드라마적 긴장감이 있고, 배우들의 연기도 좋은데다 조롱을 숨기지 않는 코미디의 속시원함도 갖췄다. 인물 하나하나에 깊이있게 다가가기 보다는 각 계층의 대표성을 띤 다양한 캐릭터들을 한 화면 속에 섞어두면서 발생하는 긴장을 극의 동력으로 삼는다. 영화는 무척이나 드러내놓고 정치적인데, 특히 현재의 미국 사회와 노골적으로 이음짓는 엔딩은 호불호는 있을 지언정 감독의 확고한 스탠스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는 감동이 있다.


3. 보헤미안 랩소디

고백하건데 나는 퀸과 프레디 머큐리의 팬이며, 이 영화를 보기 전에도 퀸의 라이브 에이드 영상은 나의 최애 공연 중 하나였다. 영화가 본격적으로 입소문을 타기도 전에 극장을 찾아 관람한 건 당연했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실망했다. 완성도야 그렇다 치고 그냥 재미가 없었으니까. 무려 퀸의 음악을 등에 업고도 이정도 감흥밖에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정말로 아쉬웠었다. 이후 영화의 기적적인 흥행과 퀸 열풍을 지켜보며 미묘한 기분이 되었다. 퀸과 프레디 머큐리의 저력을 확인받아 기쁘면서도 겨우 이정도의 작품으로 소비되기엔 너무 아깝다는 마음이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지난 연말부터 이어진 다양한 시상식에서의 돌풍은 기이하게까지 느껴진다. 기세를 몰아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 안착에 남우주연상까지 결국은 획득해낸 이 영화의 성과를 대체 어떻게 봐야할지 나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정말로 (프레디 머큐리가 아닌) 이 영화가 한해를 결산하는 시점에서 언급될만한 가치가 있는건가.


4. 더 페이버릿 : 여왕의 여자

<더 페이버릿>은 몇해 전부터 나에게 강렬하게 그 이름을 각인시킨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신작이다. 역사 속으로 들어간 그의 이번 시도는 전작들이 보여준 비현실적 설정에서 탈피하면서도 특유의 기괴함은 유지하여 이 감독이 보여줄 수 있는 세계를 한뼘 확대하는데 성공한다.  조금 더 대중적이면서 여전히 심술궂은 그의 고약한 유머감각이 특히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갇힌 공간을 광각렌즈로 촬영한 화면은 마치 망원경을 통해 화려한 세트장 속 인물들을 관찰하는 듯한 느낌을 주어 캐릭터로부터 거리를 획득하고 어느 인물에게도 쉽사리 마음을 주지 못하게 한다. 극의 중심이 되는 세 여성은 모두 자신이 주도권을 가질 수 있다고 (혹은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그 누구도 자신이 바라는 바를 온전히 달성하지 못하며 격정적인 이 권력 다툼이 결국 어떤 결핍도 해결하지 못함을 조롱하듯 지켜본다.


5. 그린북

이 영화의 감독은 의외로 <덤앤더머>,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등의 코미디 작품으로 익숙한 패럴리 형제 감독 중 형인 피터 패럴리다. 작품 외적 논란이 있기도 했지만 그 부분을 차치하더라도 이 영화에 작품상의 영예가 안겨진 것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린북은 물론 꽤나 즐길 만한 작품이다. 60년대를 배경으로 클래식 피아니스트 돈 셜리 박사와 그의 투어 운전수를 맡게 된 토니 발레롱가의 우정을 다룬 이 영화는 잘 맞지 않던 두 남자가 함께 여행해가는 과정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전형적인 버디 로드무비라 할 수 있다. 평범하기 그지 없는 이야기이지만 주연의 캐릭터 설정에 소소한 전복 장치를 마련하며 나름의 특색을 불어넣었으며, 무엇보다 두 배우의 호연으로 한단계 영화의 격을 끌어올렸다. 다만 주제가 지닌 사회성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체험의 따스함 속에 안전하게 극을 마무짓는 소극적 태도는 조금 아쉽다.


6. 로마

마법세계, 우주공간, 그리고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다뤄왔던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이전 필로그래피와 대비하면 <로마>는 정반대 지점에 있다. 이 영화는 가장 개인적이면서도 작은 세계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감독은 자전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극의 중심에 자신도, 자신의 가족도 아닌, 자신을 키워준 가정부를 두기를 선택했다. (외려 자신의 존재는 극중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심지어 아이들 중 누가 자신을 상징하는지도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이것은 사랑으로 자신을 양육하였던 존재에 대한 헌사임과 동시에, 실제로 그녀가 살아내었던 삶이 그의 세계를 형성하는데 거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명확히 하는 설정이다. 그녀의 삶은 오프닝 장면이 암시하듯 외부 세계의 거대한 움직임 속에서도 물로 바닥을 닦아내고 또 닦아내는 것이었다. 이 일상적인 생활의 노동이 다음 세대를 키워낸 기반임에 감사하면서도 감독은 그녀의 삶을 눈물겨운 희생으로 치부하는 오만을 범하지 않는다. 진정한 존중이 있기에 가능한 태도다. 완벽하게 계산되었으면서도 인위적인 느낌을 풍기지 않는 아름다운 화면들은 놀랍게도 감독 자신의 손에서 탄생했다. 이런 영화를 사운드가 좋은 관람 환경에서 볼 수 없었던게 아쉬울 뿐.


7. 스타 이즈 본

브래들리 쿠퍼의 감독 데뷔작이자 고전명작 <스타탄생>를 리메이크한 영화 <스타 이즈 본>에 대해서는 이미 한번 기록을 남겼던 바 있다. 재해석의 참신함은 없지만 원작이 지닌 가장 핵심적인 정수만큼은 확실하게 살렸다. 레이디 가가의 캐스팅도 적절하였고, 브래들리 쿠퍼가 연기한 잭슨 메인 캐릭터는 바로 얼마 전까지 실존했을 것만 같은 실제감을 주었다. 극중 그의 죽음이 그토록 참혹하게 느껴졌던 것도 그때문이다. <바이스>를 보지 않은 현시점에서 나는 남우주연상을 그에게 안기고 싶다. 아쉽지만 주제가상('Shallow')만큼은 확보하여서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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