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At Theatre

창조란 무엇인가

<에이리언 : 커버넌트(2017)>

by 프롬

영화는 저마다 추구하는 크기가 다르다. 한 사람 내부에서 일어나는 감정 변화를 세심하게 관찰하는 영화가 있는가하면 사회 구조의 모순이나 윤리적 딜레마를 다루는 영화도 있으며, 좀 더 나아가 우주와 만물의 근원을 향하기도 한다. 목표가 소박하다고 나쁜 것이 아니듯 목표가 거창하다고 좋은 것도 아니다. 작은 목표를 성실히 달성해 낸 영화에서 얻는 만족감이 거대한 목표를 가진 영화보다 못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야심 가득한 영화에 거는 기대를 숨기기는 어렵다. 이런 영화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보고 듣고 경험하는 범위를 넘어선 이야기와 질문들을 마주할, 흔치 않은 기회가 된다. 인류 기원의 비밀을 밝히겠다는 거대한 포부를 내세운 리들리 스콧 감독의 <프로메테우스(2012)>에 수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걸었던 이유다.


movie_image.jpg?type=m886_590_2 출처 : 네이버 영화


<프로메테우스>가 제시한 답은 이렇다. 인간의 창조주 '엔지니어'는 어떤 이유에선가 '에이리언'이라는 병기가 필요해졌고, '에이리언'을 키워내기 위한 숙주로서 '인간'이란 종을 창조했다는 것. 창조주를 찾아 야심찬 발걸음 내딛었던 인간들은 인류의 창조에 그 어떤 애정도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절망한다. 이는 인간이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AI(데이빗)를 만들고 이용한 것과 큰 맥락에서 전혀 차이가 없다.


<프로메테우스>가 '창조주는 누구인가'를 밝혀내는 영화였다면, <에이리언: 커버넌트>(이하 <커버넌트>)는 '창조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영화다. 창조주가 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전편을 통해 우리는 이미 엔지니어, 인간, AI, 에이리언 간의 관계를 어느정도 파악하고 있다.


1. 엔지니어는 인간을 창조하였으며, 인간을 숙주 삼아 에이리언을 배양한다.

2. 인간은 AI를 창조하여 도움을 얻는다.

3. 에이리언은 엔지니어 혹은 인간의 몸을 통해 번식한다.


movie_image.jpg?type=m886_590_2 출처 : 네이버 영화



<커버넌트>에서는 이 상하 관계가 전복된다. AI 데이빗 때문이다.


인류의 기원을 찾아가는 프로메테우스호 여정에서 자의식을 가지게 된 데이빗은 <커버넌트>에서 의미없는 창조를 한 창조주를 벌하고 스스로 창조주의 지위에 오르고자 한다. 엔지니어와 인간을 이용해 에이리언을 정복하고 복종을 얻어낸 데이빗은 이제 자신의 창조주였던 인간보다, 그 인간의 창조주인 엔지니어보다 위에 서 있다.


그렇다면 데이빗은 과연 창조할 수 있는 존재일까.


movie_image.jpg?type=m886_590_2 출처 : 네이버 영화


생물학적 의미에서 창조는 곧 번식이다. AI인 데이빗은 엔지니어나 인간처럼 자신의 유전자를 번식을 통해 남기는 것이 불가능하다. 단, 이들을 통해 에이리언을 번식시키는 것은 가능하다. 그리고 그 에이리언들을 자신에게 충성하게 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사실 데이빗은 번식을 통한 창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간은 필멸의 존재이나 데이빗은 불멸이다. 굳이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 유전자를 후세에 전달할 필요가 없다. 데이빗은 그 스스로 영원의 시간을 향유한다.


학문이나 과학기술적 의미에서의 창조도 있다. 데이빗은 실제로 연구자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에이리언을 해부하고 심지어 쇼 박사를 이용하여 실험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원하는 지식을 획득하였을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창조인지, 혹은 데이터의 축적과 분석을 통한 해결법 도출 알고리즘일 뿐인지에는 논란이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어쨌든, 데이빗은 학문적 측면에서의 창조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가장 모호한 지점은 예술적 창조성이다. 데이빗은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을까. 이 역시 논쟁적인 부분일테다. <커버넌트>에는 데이빗이 피리를 불고, 월터에게 피리 부는 법을 가르쳐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는 단순한 기술 모방일수도, 혹은 실제적 창조력의 발현일 수도 있다. 다만 데이빗은 그것을 예술적 체험으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예술의 영역에서 창작자만큼 중요한 것이 감상자라고 할 때, 데이빗은 예술을 주체적으로 즐기는 감상자로서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모든 일이 자신의 계획대로 마무리되었을 때 데이빗은 바그너의 '신들의 발할라 입성'으로 자축한다.





데이빗이 진정한 의미의 창조가 가능한 AI라고 인정한다 하여도 의문은 남는다.


그렇다면 그는 왜 창조하고 싶어하는가.


인간의 창조는 희생을 동반한다. 배를 가르는 아픔을 뚫고 새 생명을 탄생시키고, 이 생명을 키워내기 위해 수많은 노력과 시간, 재화를 들여야 한다. 생물학적 창조가 아니어도 마찬가지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실패를 무릅쓰고, 비난을 무릅쓰고 인간은 창조해 간다. 그렇기에 창조물과 강한 애착 관계를 형성하게 되며, 창작물을 타인과 공유하는 가운데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한다.


그러나 데이빗의 창조에는 이런 애정이 없다. 데이빗은 '그냥, 만들 수 있는 능력이 되어서' 만들어진 존재임에도 자의식이 생겨났다. 인간이 근원을 찾아 프로메테우스호를 타고 떠났듯 데이빗에게도 존재 이유가 필요하다. 데이빗이 창조에 집착하는 것은 창조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기 위함이다. 즉 창조 그 자체는 목적이 아니다. 창조력을 가지게 된 데이빗은 여전히 결핍되어 있다. 그에겐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해 줄 '관계'가 부재하다.


데이빗은 월터에게 피리 부는 법을 가르쳐 주지만 월터는 그가 창조를 공유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 주지 않는다. 월터는 '조금 덜' 인간적으로 개선된 AI이다. 데이빗보다 창조적 능력이 부족하다. 그러나 월터는 다니엘스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데이빗이 자신을 위해 쇼 박사를 희생한 것과 대조적이다. 과연 월터가 '덜' 인간적인가.




<커버넌트>의 결론까지만 보자면 데이빗이 인간보다, 엔지니어보다 우위를 점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태초의 창조주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창조-피창조의 관계는 이제 지배의 권력 구조로 전복되고 치환되었다. 데이빗은 지배자가 됨으로써 존재 가치를 찾았을까. 그는 아직 불완전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H0VW6sg50P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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