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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Wonderland

처음 북경에 갔던 날,

수능 중독을 벗어나게 해 준 중국 대륙의 힘

by 엄지사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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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수를 해서 대학을 왔지만 나는 적응을 하지 못했다.

그때는 공부도 못하면서 왜 그렇게 학벌에 열등감이 많았는지 모르겠다.

처음 들어간 대학도

두 번째 들어간 대학도

그 열등감 때문에 나오게 되었다.


삼수를 해서 결국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갔지만 내가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가 아니라는 이유로 남 몰래 사수를 준비했다. 지금에 와서 고백하지만 나는 수능중독이었다. 그런 게 있냐고 물어보겠지만 진짜 그런 것 같다. 반복되는 영어 문제, 수학 문제를 풀다 보면 자신감이 있어지기 마련이다. 10개 이상 틀리던 것들이 1~2개 정도 틀리게 되는 모습을 보면서 한 문제만 더 맞추면, 올 해는 잘 하겠지, 올 해는 등급이 더 잘 나오겠지라 생각했던 것 같다. 내 앞에는 이미 1~2개 정도, 아니 그 이하로 틀리지 않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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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첫 여름방학 남 몰래 수능을 100일 앞둔 무렵

학교에서 중국 북경대학교를 보내주는 프로그램에 우연히 가게 되었다.

대륙의 정기를 이어 받아? 몰래 중국에서 수능 공부를 하고 오자고 생각했다.

20살 이후 처음 가보는 해외였고, 2008년의 북경은 베이징 올림픽 준비와 열기로 가득했다.


학교에서 보내주는 프로그램이 단지 여행을 가는 프로그램이라고 착각을 했는데

지금 말하는 소위 '단기 어학연수'였다. 오전에는 수업을 들어야 하고, 오후에는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같이 온 친구들은 오전에는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자율 학습을 하기도 하고 북경 이곳 저곳을 다녔다.

사실 밤이 되면 술도 마시고, 잘 들 놀았다.


중국어 '중'자도 모르고, 성음 성조도 몰랐던 나는 첫 수업부터 난감하기 그지 없었다.

그건 나를 본 교수님도 옆에 친구들도 그랬다.


'너 여기 어떻게 오게 되었어?'라고 묻는 말에도 어떤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여행 인 줄 알고

베이징 여행 책자를 챙겨 왔어요...

그렇다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수능 공부에서 잠시 벗어나 목표를 정하기로 했다. '수업에 방해되지 않게 예습을 미리 하고 오후에는 많이 보고 즐기자'. 초급반 수업시간은 주로 문단 읽기와 단어 받아쓰기가 전부였기에 발음과 기초적인 단어를 무조건 외웠다. 오전의 수업 시간은 정말 힘들었지만 오후에 주어진 자유시간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3개월 동안의 북경 생활 동안 가장 크게 느꼈던 것 중


북경 왕푸징 앞 버스정류소에 10분 서있어보면 내가 살아온 시골에서 하루에 볼 사람들 보다 더 많이 지나가는 것이었다. 이 작은 나라에서 수능이라는 것 때문에 3년이라는 시간을 열등감으로 보냈는데 그 시간이 너무 하찮게 여겨졌다. 베이징 근교로 여행을 가면서 가까운 거리가 3시간~5시간은 걸려야 갈 수 있다는 푸다오(중국과외친구)의 말에 새삼 놀라기도 했다.


작은 나라에서

하찮은 열등감으로

큰 것을 보지 못했다.

북경에서 돌아온 나는 수능 접수표를 찢어 버렸다.

우물 안 개구리가 조금 넓은 우물로 가서 다른 세상을 보았는지 모르겠다.


요즘 많이들 여행을 가라, 떠나 보라 참 무책임하게 말들 한다고 싶지만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스스로 느끼는 것이 있는 게

여행이 아닐까 싶다.


다른 친구들에게는 단기 어학연수였지만

나에겐 엄마 몰래 수능 공부를 하러 떠난 북경에서

세상이 이렇게 크다는 것을 느꼈다.


돌이켜보면

그때 왜 그렇게 수능이라는 것에 집착했고, 학벌에 열등감이 많았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다 부질없는 이야기인데 말이지.

대학을 가면 취업

취업을 하면 또 다른 고민

결혼을 하면 자식 걱정


저마다

하는 고민과 시기가 있나 보다.

그리고 그때

나와 함께한 친구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

가끔 안부를 물어본다.


우물 안 개구리와 함께해줘서 고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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