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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지사진관 Feb 09. 2018

다섯 번째 주제.나의 올림픽

다섯번째 주제. 나의 올림픽

2015년 8월 당시 MBC 간판 예능인 무한도전은 영동고속도로 가요제를 평창에서 진행을 했다. 

당시 김태호 PD는 평창 올림픽이 몇 년이나 남았는데 왜 여기서 하냐는 물음에 

"양양 공항, 청주 공항이 후보였지만 보안상의 문제로 보류되었고, 국민적 관심도 있지만 평창 올림픽이 다가오면 더 여기서 공연을 못할 것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당시 무한도전 스틸사진을 촬영하러 간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무한도전 가요제를 보기 위해 아직 다 만들어지지 않은 스키점프대를 넘어오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약 2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스키점프대를 넘어갈 만큼 평창 동계올림픽에 대해 관심이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오늘 저녁이면 평창 동계올림픽이 열린다. 

몇 번의 실패 끝에 따낸 올림픽 


사실 별 관심이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진행하는 국제적 경기라 관심을 안 가질 수 없다. 북한의 참가로 인터넷상에서는 이게 평창올림픽이냐, 평양 올림픽이냐 라는 말이 오가기도 하지만 북한의 참가가 아니었다면 이 정도의 관심조차도 없을 것 같다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아이스하키가 너무 보고 싶었다. 표 가격도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지만 경기가 밤 11시 45분에 끝난 다는 건 절망적이었다. 경기 시간이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강릉에서 1박을 해야 할 수밖에 없고, 강릉의 숙박 가격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물론 이런 행사를 할 경우 숙박 가격은 오를 수밖에 없다) 농담은 인터넷 댓글은 "지금은 일본 여행밖에 못 가지만 열심히 돈 벌어서 평창에 꼭 갈게요"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니 말이다. 하나 궁금한 건 정말 비어 있는 곳곳의 경기장에 표들이 팔릴까 하는 의문도 든다. 각 지역단체에서 단체 응원을 가기도 하고,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응원에 대동되기 때문이다.


큰 스포츠 경기를 앞두고 아쉬운 점은 경기가 열릴 때만 반짝 보이는 관심이 안타깝다. 어릴 적 축구를 했을 때 우연한 기회로 캐나다 밴쿠버에서 축구를 한 적이 있다. 그 무렵 우연한 기회로 캐나다 밴쿠버에 교환학생으로 가게 됐는데 깜짝 놀랄 일을 겪었다. 수업 이후 학교에 소속된 여자 축구부에서 뛰게 됐는데 우리 팀이 졌다. 너무 분해 축구화를 던졌다. 친구가 내게 와서 “왜 그래? 뭐가 그렇게 화가 났어?”라고 묻자 “경기가 져서 너무 분해”라고 답했다.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지. 넌 최선을 다했잖아. 다음번에 더 잘하면 돼.” 이 한마디는 충격이었다. 경기에서 늘 이겨야 하고, 잘해야지 눈에 띄어 선수로 발탁될 수 있었던 게 한국의 축구 세계였다. 


두 번째 충격은 축구 선수들도 수업을 성실하게 듣고 수업 후에야 운동을 한다는 것이었다. “선생님, 수업은 꼭 들어야 하나요?” 처음에는 운동만 하고 싶어 존 선생님께 물었다. “혹시나 운동을 포기할 경우에 대비해 일상적인 교육을 받아야지. 다른 것을 할 수 있어. 수업은 필수야.” 세 번째 충격은 운동 경기가 있는 날은 온 마을이 축제였다는 점이었다. 1등, 2등 도장을 찍어줬던 한국의 운동회가 생각났다. 캐나다는 달랐다. 열심히 뛴 상, 기똥찬 패스 상 등 재미있는 상이 많았다. 경기를 뛰었던 모든 친구들에게 재치 있는 상이 주어졌다. 집에 돌아오자 홈스테이 맘 또한 “오늘 경기는 정말 최고였어”라고 칭찬해줬다. “경기는 졌는걸요.” “아니야, 네 위치인 수비 역할은 충분히 잘했어. 각자 위치에서 역할을 잘했잖아. 그리고 다치지도 않았잖아! 잘했어.” 운동 그 자체를 즐기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았다.


이제는 가끔 여자축구 경기를 보기는 하지만 응원석은 텅 비어 있기 일쑤다. 비인기 종목은 어디서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다. 비단 축구만 그럴까 싶다. 생활 체육화가 일반화되지 않은 현실. 운동을 즐기는 것이 아닌 1등만 알고 있는 우리들의 현실은 어떨까 싶다.

사실, 동계올림픽이 끝난 그 이후가 더 궁금하다. 올림픽 유치는 국가적으로 상당히 거대한 이벤트다. 올림픽 개최와 함께 몰리는 세계적인 관심과 자본은 실로 굉장한 효과를 거둔다. 단 네 차례의 행사에 쓰이기 위해 지어진 뚜껑도 없는 1천63억짜리 건물의 미래는 어떨까? 일전에 모 작가가 올림픽이 끝난 곳곳을 돌아다니며 기록한 사진들이 있다. 올림픽의 열기가 식은 황폐해진 마을들의 모습인데 행여나 평창이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생각해보니 몇 년 전 사진기자 시험 당시 

"나중에 어떤 사진 찍고 싶어요?"라는 질문에

"평창 동계 올림픽을 기록하고 싶습니다!"라고 당차게 말했던 나는 어디로 갔나 싶다.


글.엄지사진관


1.

올림픽 개막식이 열리는 날, 바로 그 시각, 프로포즈를 했다. 

2008년 8월 8일 8시 8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의 축포가 올라가는 그날

이태원의 한 이태리 식당에서 결혼을 약속했다. 


당시 나는 한 통신사의 올림픽 프로모션 때문에 베이징 출장을 마치고 막 돌아온 터였고, 

중국 항공사 승무원인 각시도 비행을 마치고 들어와 있었다. 

중국, 베이징 올림픽과 인연이 많은 우리는 그날을 앞으로도 기념할 날로 정했다.


2008년, 한국 나이 31살, PR회사 대리 

내 고객사였던 통신사 로밍사업팀은 베이징 올림픽이라는 메가 이벤트를 맞아 대대적인 프로모션을 펼치고자 했다. 2년 안 되는 기자 생활을 마치고 1년 조금 넘는 PR 경험으로 치르기에는 벅찬 사이즈였다.  


직장생활에서 ‘대리’는모든 것을 다해야 하는 직급이다. 올림픽 경기 티켓을 구하는 일부터, 아니 그보다 더 사소하게는 매일매일 뉴스 스크랩을 하는 일부터, 아니 그 신문 기사를 오려서 종이에 붙이고 스캔하는 일부터, 


조금 더 크게는 고객사와 언론사 사이에서 발생하는 각종 이슈들을 중재하고, 아니더 크게는 프로모션의 아이디어를 내고 기획안을 쓰고, 아니 좀 더 크게는 최종 결과물을 보고하기도 하고,


아무튼 대리는 상병 말호봉 같다. 

막 데리고 일해서 ‘대리’이고대신 다 시키니까 ‘대리’이다. 


대규모 프로모션의 시작 날, 프로포즈를 했다.

그리고 베이징 올림픽이 끝나고 ‘과장’으로 승진을 했고, 그 해 말 결혼을 했다. 

일로는 가장 힘들었던 그 해에.


2. 

커다란 메인스타디움은 비워지고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늦은 여름의 토요일 오후 시간이 주는 나른함과 어울리는 고요함이다.

내 또래 국민학생 한 명이 굴렁쇠를 굴리면서 스타디움을 가로지른다. 

묘하게 평화롭다. 스타디움의 끝에서 굴렁쇠를 손에 들고는 다른 손을 흔든다.


1988년 한국 나이 11살, 국민학교 4학년.

나는 내쇼날 브라운관 TV 앞에 바짝 붙어 앉아서 국가 행사에 경건히 참여하고 있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내 또래가 나와서 화면을 독차지하면서 무언가를 하고는 들어갔다. 


‘저 굴렁쇠는 뭐지? 우리 저런 거 안 가지고 노는데 

그런데 저 아이는 누구지? 

쟤는 뭔데 주인공이지? 아! 나도 저런 곳에서 주인공이 되고 싶다.’

개막식을 보며 대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후엔 집을 나와서 동네를 누비며 놀았다. 여느 토요일 오후처럼.

작은 소도시에서 조성된 택지 한가운데 새로 건설된 맨션에서 살았던 나는

공터에서, 주택 공사장에서, 건설용 자재를 쌓아놓은 창고를 놀이터 삼아서 놀았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선 주공 4단지 아파트가 완공을 앞두고 있었고,

도라지 꽃이 펴있던 집 주위 공터들은 상가주택들로 차기 시작했다. 


1988년은 그랬다. 

더웠고 공사가 많았고 평화로웠다. 도라지 꽃에 앉은 꿀벌들을 잡으면서 놀았던 그 해 여름.


3. 

뭔가 어울리지 않는 영화 제목이다. 

지금으로 치면 ‘우리 동네 예체능’ 같은 느낌이었다. 


‘상계동 올림픽’

학생회관 한편의 강의실에서 빔프로젝터를 스크린에 쏴서 봤는데 잘 안보였다. 

초점도, 색감도 흐렸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도시미관을 이유로 철거가 한창인 달동네 재개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다큐멘터리였다.

▲ 상계동 올림픽 (1988)


 재미가 없었다. 분노가 일지도 않았다. 부당함에 주먹을 쥐며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1997년 한국 나이 20살, 대학교 신입생.


그냥 대학생이 되었기에 통과의례처럼 봐야 했던 영화였다. 아니 정확히는 선배들이 보여줬던 영화였다.  

비판적 사회의식은 일부러 챙겨야 할 만큼 캠퍼스의 분위기는 자유롭고 풍요로웠다. 

X세대, 오렌지족, 락 카페, PCS이란 키워드로 기억되던 시기. 


당시 사회과학대 노래패 활동을 했다. ‘철의 노동자’, ‘인터내셔널가’ 등을 불렀다. 

내게 당시는 투쟁적이기보다는 낭만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야학하던 선배도, 닭장차에 잡혀 즉심에 넘겨졌던 동기도.


그때 분위기가 그랬다. 

그 해 11월이 오기 전까지. 


4.

날이 춥다. 지난해 겨울이 이렇게 추웠던가 싶다. 

하긴 작년은 촛불로 뜨거웠다.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두 번째 올림픽인데 전처럼 설레지가 않는다.  

아~ 그래 그러고 보니 전에는 조금 설렜구나!


평창 올림픽, 평화 올림픽, 평양 올림픽

올림픽도 이런저런 프레임을 덧씌워서 치고받고 싸우니 예스럽지가 않다.  


수년에 한 번씩 오는 이벤트는 기억의 책갈피 갔다.

다시 10년이 지나서 지금을 떠올리면 어떤 느낌이 남아 있을까?

그게 더 궁금할 뿐이다. 


축제는 시작됐다. 

글.엘리엇


- 별별차이나는 매주 금요일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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