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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대여성 Sep 05. 2020

산 너머 산

멍 때리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태국의 빠이. '배낭여행자들의 성지'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작지만 알차고 태국 속에 있는 또 다른 지구 같았다. 오토바이 한 대만 있다면 마을 전체를 둘러보는데 일주일이면 충분한 이 작은 마을 빠이에서 나는 무려 한 달을 살았다


30일간의 여정은 내가 일을 할 때 꿈꿨던 일상들의 연속이었다. 오후 12시 기상, 침대에서 좀 더 뒹굴거리기, 배고픔이 예민함을 이기기 전에 점심 먹으러 가기, 가보고 싶었던 장소 가기, 느적거리기 좋은 카페에서 책 읽기, 일몰 명소에 가서 해지는 모습 감상, 야시장 구경, 재즈바에서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들에 취하기, 늦은 저녁식사, 야식과 여러 안주거리들로 감기는 눈꺼풀을 이겨가며 새벽까지 수다 떨기


 

아무리 꿈꿔왔던 날들이라지만 2주 이상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 적응되자 이따금씩 지루함이 찾아왔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일도 어느새 기빨리고 피곤한 일로 치부되어 다른 자극제가 필요했다. (맞다. 먹을 만큼 먹고 놀만큼 놀았다는 뜻)

 

그렇게 조금씩 생산적인 일을 찾기 시작했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싸이월드 시절부터 페이스북 세대를 거쳐 인스타와 블로그까지 이어진 나의 글쓰기 활동이 생각났다. 글을 써야겠다. 그럼 뭘 먼저 해야 할까. 글을 쓰려면 생각을 많이 해야지. 생각을 하기 좋은 장소가 어디지? 경치 좋고 사람 적은 곳. 멍 때리기 좋은 곳


반복되던 일상 여러 개를 지우고 항목 하나를 추가했다.

 때리기 좋은  찾기'


숙소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2~30분 내달리면 현지인들의 생활 전경이 고스란히 담긴, 카페라는 단어 하나로 표현하기엔 너무 광활한 장소를 알아냈다. 아는 사람들만 알고 있는 곳.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지만 아무한테도 알려주기 싫은 곳. 어렵게 구한 한국 책들과 초콜릿을 들고 일주일에 두세 번씩 이 카페를 찾았다




 


 







오토바이로 외길 언덕을 타고 울퉁불퉁 오프로드급 흙길을 올라오면 만날 수 있는 곳. 3천 원 남짓 하는 음료 한잔에 이런 풍경까지 담아주신다













멍 때리는 일은 의외로 많은 집중을 필요로 했다. 여행 온 이후로는 아무런 생각 없이 의식의 흐름대로 지냈는데 가만히 자연을 보고 누워있으니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저 구름은 왜 저런 모양이지?' '밭은 또 왜 이렇게 커?' '그럼 생산량은 얼마나 되고 이걸 어떻게 수출하는 거야' '이렇게 일하면 임금은 얼마일까' '매일 여기까지 오르고 내리면 살이 많이 빠질까' '일하다가 급똥 신호가 오면 화장실까지 너무 먼데' '산 너머에 산은 왜 이렇게 많아' 등등 당연한 질문들부터 엉뚱한 질문들까지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멍을 때리면서 나는 산 너머에 산이 있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겹겹이 쌓여 있는 산. 그 너머의 모습을 보니 바다(산 사이에 껴 있는 구름의 모습이 꼭 바다같이 보여서)와 구름과 노을이 있었다. 그것들은 바람에 몸을 실어 내쪽으로 넘어왔다.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은 산이었지만 바다도 구름도 노을도 바람도 느낄 수 있었다


자리에 누워 하늘에 가장 높게 떠있는 구름을 찾아 쳐다보았다


문득, '산 너머 산이다'라는 말이 맴돌았다. 할 일이 태산일 때, 큰 고비를 넘겼더니 더 큰 고비가 기다리고 있을 때 주로 쓰이는 부정적인 말. 가장 높이 떠 있는 구름을 시작으로 천천히 시선을 옮겨 눈 앞에 있는 풍경들을 다시 담았다. 하늘 아래 구름, 구름 아래 노을, 노을 아래 산, 그 사이에 바다.



바람결이 느껴질 때 한숨 돌리고 조금 더 멀리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보면 '산 너머 산'이라는 말은 더 이상 부정적인 표현을 할 때만 쓰는 말이 아니란 걸 알게 된다.


보려고 할 때 보이지 않았던 것들은 '본다'는 행위를 멈출 때 다른 감각들을 통해 더 격하게 보인다. 헤쳐나가야 된다고만 생각했던, 수행해야 하는 임무처럼 느껴졌던 다음의 산들은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었고 깨고 넘어가야 할 하나의 단계가 아닌 곁에 두고 가야 하는 삶의 일부분이었다


산 너머 산, 그 너머에는 분명 아직 내가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더 많은 것들이 있을 거다. 들은 대로 믿고 믿은 대로만 보는 것은 가끔 너무 지루한 일이다. 가끔은 지나친 단상을 멈추고 바람을 타고 실려오는 것들을 그저 멍하니 느끼는 연습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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