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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대여성 Sep 12. 2020

얼그레이 도넛을 고르기까지

때론 지나친 신중함보다 타인의 말 한마디









"이 집은 얼그레이 도넛이 제일 맛있어"


수많은 빵 종류를 눈 앞에 두고 선택 장애가 왔다. 같은 도넛이지만 필링에 따라 맛과 가격이 달라 5분 넘게 멍을 때리고 있었다. 사실 선택의 만족도는 큰 고민 없이 빠르게 결정할수록 올라간다는 걸 알지만 알면서도 잘 안된다.


누군가는 이 글을 읽으며 '먹고 싶은 맛 여러 개 사서 먹으면 되는 거 아닌가?'라는 해결책을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 당시의 나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냥 딱 하나만 먹고 싶었다. 뒤에 줄을 선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순서를 양보해가며 하나씩 하나씩 도넛들을 탈락시켰다. 선택이 힘들 땐 하나씩 탈락시키는 것도 방법이다. 그렇게 딱 두 개의 선택지만을 남겨놓았다.




인생의 중대한 결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런저런 이유들로 다른 빵들을 탈락시키고 얼그레이 크림 도넛과 생크림 도넛만을 남겨놓은 상황. 정말 박빙이었다. 두 개를 모두 구매해버리는 쉬운 해결 방법이 있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오기가 생겨 정말 딱 하나만을 골라서 먹고 싶었다. 그때 순서가 다가온 다른 손님의 말이 갑자기 귀에 때려 박듯 들려왔다. "이. 집. 은. 얼. 그. 레. 이. 도. 넛. 이. 제. 일. 맛. 있. 어" 한 글자도 빠짐없이 귀에 들어오던 그 말에 홀려 나는 바로 얼그레이 도넛을 주문했다.


신중함 끝에 고른 맛이라 괜히 더 맛있게 느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지만, 그 집의 얼그레이 도넛이 너무너무 맛있어서 이리저리 사진을 찍은 것도 모자라 만나는 친구들에게 꼭 먹어보라며 적극적으로 추천을 하기도 했다.




그날 만약 내 옆에서 얼그레이 도넛이 맛있다고 말해주던 그 사람이 없었다면 나는 과연 무슨 맛을 골랐을까. 영업시간이 끝날 때까지 도넛을 고르고 있었을까. 최종 선택을 눈 앞에 두고 그냥 가게를 나왔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갑자기 노선을 변경해 도넛 한 박스를 가득 채워 사 왔을까.


문득 자려고 누웠다가 이날의 일을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한마디 했다. '인생 너무 피곤하게 살지 말자'


가끔은 지나치게 진득하고 예민한 신중함보다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결정을 내리는데 큰 도움을 줄 수도 있고 별생각 없이 고른 것이 큰 만족감을 줄 때도 있다. 반대로 몇 날 며칠 신중을 기했지만 조금의 만족감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매사 너무 진중하게만 살 필요도 없고, 끝없이 긴 고민들이 나를 통제하게 두는 상황들을 많이 만들 필요도 없다. 많고 많은 선택의 폭에 심혈을 기울이는 만큼 만족도는 떨어진다.




고르는 연습보다 탈락시키는 연습이 필요한 시대다. 어느 빵집에서 심각하게 빵을 보며 선뜻 집어 들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평소보다 조금 밝은 목소리로 "이 집은 이 빵이 맛있더라" 하고 혼잣말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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