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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래 Dec 24. 2021

넷. 차(tea)

2021년 나를 바꾼 열 가지

정수기에서 550ml 물을 뽑는다. 전기주전자에 물을 올려 100도로 맞춰 끓인다. 그 사이 방으로 들어가 차와 차호를 고른다.


짙고 깊은 보이차, 향이 좋은 백차와 맑은 우롱과 청차, 그리고 꽃차 몇 가지가 있다. 루스티로 홍차와 루이보스도,


그날의 몸 컨디션, 마음 상태, 날씨, 마시는 시각 여러 가지를 생각해 차를 고른다. 보통 아침에는 잘 익은 보이숙차를 꺼낸다.


차를 고르고 나면 차호를 본다. 차분하게 진하게 마시고 싶을 때는 자사호를 사용하지만 꼭 자사호만을 고집하진 않는다. 자사호가 몇 개 없기도 하지만 유리나 도자기 차호로 차를 우려도 맛있는 차는 틀림없이 맛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떤 날은 예쁜 개완을 먼저 손에 쥐고 차를 고르기도 하는데, 좋아하는 차호는 어떤 차를 만나도 좋은 맛이 난다.


차기, 열감 같은 어려운 부분은 여전히 익혀가고 있는 중이고, 끝까지 잘 모르고 차를 마셔도 좋다 싶다.


처음엔 보이차만 마시다가 요즘은 여러 가지 차를 마신다. 은은한 꽃과 풀의 향을 가진 백차는 혼자 있는 오후에 마시면 그 자체로 명상이다. 숲으로, 들판으로, 언덕으로 가 있는 기분이다. 꽃이 들어 있지 않아도 어떤 차는 얼굴이 큰 꽃의 희미한 향을 내고, 어떤 차는 잔잔한 들꽃으로 만든 부케향이 난다. 오래 익은 차에서 방금 뜯은 상쾌한 풀향이 나는 것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지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 알 수가 없다.


혼자 하는 차도 좋지만 소소하게 말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하는 찻자리도 참 좋다. 술은 긴장을 풀어주지만 감정을 들뜨게 한다. 어떤 순간에는 너무 기뻐 주체할 수 없고, 또 어떤 때에는 슬픔이 땅을 파고 들어가기도 한다. 그렇지만 차는 다르다. 술과 비슷하게 따르고 넘기고, 가끔은 서로 잔을 채워주지만 차는 긴장도 풀고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혀준다. 비슷하지만 다르다.


차는 혼자 마셔도 둘, 셋 여럿이 마셔도 죄책감이 없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돌보는 기분.


과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좋은 것을 알았으니 자꾸 들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좋은 차가 나오면 사고 싶고, 기다리던 차호가 보이면 사고 싶다. 혼자 하는 찻자리에 심심하지 않게 귀여운 차총도, 예쁜 차칙도 자꾸 보인다.


차를 한 잔 내려 마시면서 지금보다 더 과해지지 않으려 다짐을 한다. 세상에 좋은 것은 너무 많지만 나는 지금도 참 좋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넘치지 않게 중심을 잡아주는 차. 흔들리지 않기를, 욕심내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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