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하는 날, 그런 날.

김장, 풍경.

by 타래

울산에 계신 엄마가 이번주에 김장을 하신단다. 몇 주 전부터 말씀하셨지만, 하필이면 나도 딱 그날에 회사에서 기획한 김장 행사가 있어 내려가긴 힘들게 생겼다. 20-30포기는 금방이라고 말씀의 끝에 조금의 아쉬움과 섭섭함이 전화기로 전해진다. 우리집은 김장을 두 번 한다. 12월 초에 한 번 그리고 12월 24일에 또 한 번. 겨울과 초봄까지 먹을 것과 여름을 지나 다음 김장. 어쩌면 3,4년 지나서 먹을 묵은지를 따로 하시는 것 같은데, 굳이 한 번에 해도 될 일을 왜 두 번에 나눠서 하는지는 아직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여하튼 이렇게 한 번에 몰아서든, 두 번에 나눠서든 김장은 꼭 해야한다. 눈이 본격적으로 내리고 나면 싱싱한 채소도 없거니와, 김치가 없이는 살 수가 없다. 지금이 지나고 김치가 맛있게 익으면 이 김치로 밥은 물론이고, 김치찌개, 김치전, 그리고 라면을 끓여서 얹어 먹어야 한다. 물론, 한 겨울 1월 말 정도에 고구마를 쪄서 위에 척- 하고 올려먹을 김치도 바로 이 김장김치겠지.


여튼 올해는 집안 김장을 거들지 못하게 됐는데, 사실 내가 간다고 해서 딱히 하는 일도 없다. 무나 씻어 채 써는 정도, 아니면 마늘을 씻어 블렌더에 갈거나, 배 껍질을 까는 정도가 일의 전부다. 다른 집은 다 같이 모여서 배추에 양념소를 넣는 건 한다고 하는데, 우리집은 모두 다 엄마 차지다. 나의 직업과는 아무 상관없이 엄마 손이 거쳐야만 그 맛이 난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배추의 절임 상태에 따라서 배추를 만지는 손길은 달라져야만 하고, 양념 또한 배추의 상태에 따라 그 양을 가감해가면서 적절하게 발라줘야한다.


우리집에 김치 냉장고라고 하는 것이 생긴지가 벌써 한 20년이 다 되어가는 것 같다. 서울집에서 김치 냉장고를 산지가 벌써 9년이 됐으니 아마도. 요즘은 스탠드형으로 되서 칸칸이 나눠진 예쁜 김치 냉장고를 사용해서 수납이 편리하다. 그 칸칸 모두에 조금씩 다른 김치들을 채우고 나면 김장하는 날의 하이라이트가 시작된다.


삼겹살을 통째로 삶는다. 물을 많이 넣진 않는다. 대신에 압력솥을 이용한다. 된장을 한 숟갈 넣고, 알커피도 조금 뿌린다. 양파를 크게 썰어 넣고, 파도 넣는다. 압력솥이 칙칙 소리를 내면서 돌아가면 집 안에 돼지고기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준비된 수육에 양념을 바르지 않고 둔 절인 배추와 굴까지 넣어 맛있게 만들어진 양념을 따로 두고 얇게 편으로 썬 마늘 한 조각, 고추 한 조각 올리고 싸서 먹는다. 아빠는 역시나 막걸리를 찾고 그 동안 허리 펼 시간 없이 일하던 엄마도 한 잔 거든다. 딱 맞춰 다 된 밥이 나오면 밥 위에 굴, 배채, 무채를 골고루 얹어 한 숟갈 크게 떠서 입으로 넣는다. 아직 뜨거운 김이 빠지지 않은 밥은 입 밖으로 남은 김을 뿜고, 뜨거움과 양념의 매콤함, 무채의 시원함, 배의 달콤함과 마지막으로 굴의 바다향이 그대로 전해진다. 굳이 좋은 식탁에 앉아 먹지 않아도 좋다. 작은 다과용 상에 온 식구가 무릎붙이고 껴 앉아 먹는 이 맛, 서른이 다 된 딸이 부끄러움을 잊고 “아빠, 아~” 라고 하는 징그러운 애교도 통하는 김장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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