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철이 죽었다. 새벽 2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자취방으로 가던 길이었다. 인도를 걷던 진철 쪽으로 하필 야식 집 배달 오토바이가 질주해 왔고, 진철은 오토바이를 피하려다 하필 인도 턱에 발을 헛디뎌 도로 쪽으로 넘어졌고, 하필 그때 한갓진 밤길을 130킬로미터로 달리던 음주운전 차량이 지나갔다. 봄밤, 거리 가득 흩어지던 라일락 향기처럼 스물다섯 번째 생일을 이틀 앞둔 진철의 짧은 생이 흩어졌다.
장례식장 구석 자리에 앉은 연은 연거푸 잔에 소주를 따랐다. 좀 천천히 마시라는 지민의 만류에도 연은 누군가 쫓아오기라도 하듯 허겁지겁 술을 들이켰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옆 테이블에서 여러 선후배에 둘러싸여 흐느끼는 윤주를 보며 네가 울 자격이 있냐고 따지고 싶은데, 너는 그렇게 당당히 울 수 있어서 좋겠다고 외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으니 애꿎은 잔에 소주만 채울 수밖에.
진철과 윤주는 진철이 제대하자마자 사귀기 시작했다. 진철은 입학했을 때부터 윤주를 짝사랑했다. 둘이 사귄 지 1년이 좀 지났을까. 가끔 만나면 속 이야기를 툭툭 털어놓던 연에게 진철은 반쯤은 술에 취해 말했다. 윤주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 같다고. 어떻게 나를 속이고 그럴 수 있냐며 따져 묻고 싶지만 행여나 윤주가 떠날까 봐 그럴 수가 없다고. 진철은 학비는 학자금 대출과 장학금으로, 생활비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충당했다. 이미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만큼 바빴지만 어떻게든 윤주 마음을 돌리려고 아르바이트를 하나 더 뛰었다. 스물다섯 진철이 가진 것이라곤 순정과 체력뿐이었으니까.
연은 문득 궁금해졌다. 진철이 새벽에 일하면서까지 윤주에게 꼭 주고 싶다던 선물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생각했다. 곧 있을 진철 생일에 주려고 쓴 편지를. 네가 입학하자마자 윤주를 좋아했듯 나도 그때부터 너를 좋아했다고. 네가 제대하기를 쭉 기다렸다고. 네가 윤주와 사귀면서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참 서글펐지만 그렇게라도 네가 웃는 모습을 보니 나는 좋았다고. 윤주가 너 몰래 다른 사람을 사귄다는 걸 알고 아파하는 너를 보며 나라면 너를 울게 하지 않을 거야, 라고 적다가 그렇지만 나는 윤주처럼 너를 웃게 할 수도 없을 테지 라는 생각에 마무리 짓지 못한 그 편지. 이럴 줄 알았으면 끝맺음이라도 할 걸. 네게 건네지 못하더라도 끝맺기라도 할 걸. 점점 커지는 윤주의 흐느낌에 연은 속절없이 퍼붓던 소주잔을 내려놓고 장례식장 밖으로 나왔다.
버린 사랑의 죽음 앞에서 세상 무너진 듯 떨구는 윤주의 눈물은 사랑이었을까. 이미 마음 떠난 사람인 줄 알면서도 붙잡으려 했던 진철의 몸부림은 사랑이었을까. 내내 곁에서 친구로만 머물다 끝끝내 고백 한 번 하지 못하고 속 끓인 내 후회는, 사랑이었을까. 연거푸 들이킨 소주로도 묽어지지 않는 마음, 노여움인지 슬픔인지 아픔인지 모를 그 마음을 어찌하지 못해 끊었던 담배에 불을 붙이며 연은 생각했다.
사월이라고 해도 밤은 아직 쌀쌀했다. 코트 자락을 여미던 연은 고개를 돌렸다. 어디선가 그윽하니 라일락 향이 불어왔다. 뭉근하게 마음을 파고드는 달짜근한 향기에 연은 그만 툭, 손에 쥔 담배를 떨구었다. 그리고 눈에서는 노여움인지 슬픔인지 아픔인지 후회인지 모를 마음이 뚝뚝, 떨어졌다. 이제는 영영 그 사람에게 가 닿을 수 없는, 사랑이라는 그 마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