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농업연수 #4] 헤런부런 생산소비자협동조합

너도 농부, 나도 농부, 생산과 소비의 경계를 허물다

by 진정은


2025년 4월 2일(수) / 네덜란드 / 헤런부런(Herenboeren) 생산소비자협동조합


일주일에 하나의 글을 올리자던 스스로의 다짐은 생각보다 빠르게 무너졌다. 그럼에도, 귀한 기억들이 사라지기전에 다시 기록들을 꺼내어본다.

이날 아침은 유럽 연수 기간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도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정화 언니와 창문 문제로 뒤척이던 밤을 지나, 우리는 새벽 공기를 가르며 호텔 밖을 나섰다.

마침 해가 떠오르던 순간, 하늘에 번지던 귤빛의 노을은 하루의 안녕을 전했고, 그 장면은 사진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우리는 걷고, 이야기를 나누고, 또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 아무 말 없이 걷는 시간조차 자연스러워졌다. 아침의 공기와 온도를 함께하며 우리는 좀 더 가까워지지 않았을까?


역시나 그렇듯, 연수는 오전부터 시작되었다. 네덜란드 루넌에 위치한 작은 농장 헤런부런(Herenboeren) 직역하면 “우리가 함께 짓는 농장”이다.

대산 연수단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헤런부런협동조합의 조합원(자원봉사자)들이 직접 발표를 해주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이 농장에는 사장이 없다. 소비자도 없다.

출자금을 내는 모두가 주인이자 농부이며, 기업가이자 경영자로서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약 300가구가 조합원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한 가구당 1,000유로(약 150만 원)의 출자금을 내고 매달 회비를 낸다. 이 돈은 이윤을 위한 자본이 아니라, 농장을 유지하기 위한 운영비이자 공동체의 약속과도 같다.


조합원들은 다섯 개의 팀으로 나뉘어 농장의 일을 나눈다.

채소를 재배하고, 가축을 돌보며, 고기를 가공하고, 시설을 수리하고, 식재료를 배분하는 일까지.

이곳에서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가 사라지고, 모두가 농부가 된다.


농장의 규모는 18헥타르. 혼작을 하는 종합농장으로서, 가축이 뛰노는 목초지, 장목이 자라는 밭, 과수원, 허브밭, 온실, 그리고 축사가 조화롭게 자원 순환농업을 위해 연결되어 있다.



이들은 화학비료나 농약을 쓰지 않는다. 유기농 인증은 받지 않지만, 유기농 기준을 충분히 충족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먹을 것을 스스로 기른다. 인증보다 중요한 건, 신뢰다.

자신과 가족이 먹을 음식을 스스로 재배하는 것만큼 분명한 기준은 없지 않을까?


농장의 중심에는 두 명의 직업 농부가 있다.

이들은 경작 계획을 세우고, 조합원들에게 작업을 안내한다. 대부분 도시에서 온 조합원들에게 이들의 전문성은 꼭 필요하다. 직업 농부는 단지 일을 지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공동체의 리듬을 조율하는 사람이다.

주 4~5일 근무하며 전국 지원조직의 체계적인 복지 아래, 병가나 휴가, 대체 인력 지원까지 보장된다.

조합원들끼리는 “너도 농부, 나도 농부”라 부른다.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보이지 않는 연대 속에서 함께 성장한다.


이 농장을 이루는 3가지 요소는 자연, 돈, 사회적연대이다.

지속가능한 농업을 위해선 자본이 필요하고, 그 자본은 조합원들이 스스로 책임진다. 그래서 이들은 “함께 지속가능한 음식을 생산하자”는 목표 아래 공동으로 소유하고, 함께 작물을 정하고, 함께 책임진다.


매주 금요일이면 조합원들에게 이번 주 식재료 박스에 담길 작물 목록이 전달된다.

토요일이면 많은 가족들이 농장을 찾는다. 이들은 제철 채소 4~5가지와 계란, 가끔은 고기도 바구니(2~3달에 1번 정도)에 담아 돌아간다. 그날 그날 채소의 상태에 따라 구성은 달라진다.

필요한 만큼만 생산하고, 남는 건 저장하거나 가축에게 주며, 부족하면 덜 나눈다. 이 단순한 원칙이 농장을 지탱한다.


알레르기나 식단 제한이 있는 조합원들은 자유롭게 구성을 바꿀 수 있다. 도심에 사는 이들을 위해 동네별 모임이 자생적으로 생겨났고, 서로 대리 픽업을 해주며 관계를 이어간다. 이곳에는 유연함이, 그리고 배려가 흐른다.


지속가능성이란 무엇일까.

멀리서 가져온 식재료가 아닌, 지역에서 생산한 것을 지역에서 소비하는 것에서 시작되지 않을까(지산지소).

이 농장은 조합원 가구에서 연간 필요한 식재료의 약 60%를 농장에서 자체 공급하는것이 목표이다.

외부 투입 없이 농사짓고, 토양을 돌보고, 매년의 경험을 쌓아 더 정교하게 조절한다.


기후 위기와 생물 다양성에도 민감하다.

한때 야생 여우가 닭을 습격해 30마리가 희생된 적도 있었다. 이후 닭들은 낮에는 자유롭게 방사되고, 밤이면 ‘치킨 트랙터’라는 이동식 축사에 들어간다.

작은 새싹은 천으로 덮고, 울타리로 야생동물을 막는다.

이곳의 토질은 진흙과 모래가 섞여 배수와 보습에 모두 유리하다. 기후 변화 속에서도 비교적 안정적인 수확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다.


헤런부런은 네덜란드 전역에 23개 농장이 운영 중이며, 28개 농장이 설립을 준비 중이다.

농장마다 1~2명의 직업 농부가 있으며, 전역에 약 45명의 농부와 7명의 인턴이 활동 중이다. 이들 중 다수는 어제 다녀온 발몬더르호프 재단의 졸업생이었다.

농장들은 보통 2~3곳씩 묶여 지식교류를 하고 있으며, 전국 연대 조직은 교육, 인사, 장비, 홍보를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숫자나 시스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합원들이 이 모든 과정을 삶의 일부로 여긴다는 사실이다.

조합원들은 소풍을 오듯 농장을 찾는다.

바구니와 물병을 들고, 자전거를 타고 들판을 가로지르는 길. 농장은 단순한 일터가 아니라 숨을 고를 수 있는 쉼터이자, 계절의 인사를 주고받는 식재료 박스를 나누는 자리다.


이곳에서 음식을 먹는다는 건, 단순한 소비가 아니다.

내가 먹는 것을 내가 책임지고, 그 책임을 공동체와 나누는 삶이다. 아이들과 흙을 만지고, 축제를 열고, 커피를 마시고, 웃으며 수확한 채소를 나누는 일. 그것은 관계를 가꾸는 일이자,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선택이다.


“농부란 누구인가?”

농부는 땅을 소유한 사람만도, 전문가만도 아니다.

농부는 자기 삶을 스스로 가꾸고, 자기 밥을 스스로 짓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일을 혼자 하지 않고, 이웃과 함께 한다. 함께 짓는 농장, 함께 먹는 식사,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그것이 바로 헤런부런이 말하는 미래의 가능성이다.





현장 Q&A



Q. 유기농 인증은 받지 않나요?
유기농 인증은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네덜란드에 일반적으로 적용하는 식품법에는 따릅니다. 그리고 육고기의 경우에도 최소한으로 충족해야할 식품 기준법은 당연히 준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기농 인증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인증은 관리감독이나 유지비용, 여러가지 행정절차를 해야 하거든요.

유기농 인증을 충분히 통과할만한 재배방법으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Q. 23개 농장의 재배기준 가이드라인이 있나요?

일단 총회에서 조합원들이 뭘 먹고 싶은지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 직업 농부가 판단을 해줍니다. 기술적으로 너무 특수한 작목이어서 어렵다, 아니면 몇 년 후에 가능하다, 우리가 해 볼 수 있겠다. 이런 식으로 4~50개 재배 종류를 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재배 가이드라인은 주로 전문 농부들의 지식에 따라서 경작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Q. 이 농장을 한국에서도 만들 수 있을까요?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해 주고 싶은 조언이 있을까요?
가장 중요한것은 일정 수의 최적화된 조합원을 모집하는것입니다.

최소 200가구 이상의 조합원, 신뢰할 수 있는 직업 농부의 전문성, 그리고 그 삶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들의 열정, 분명하고 명확한 매뉴얼이 필요합니다.


Q. 식재료 박스에 매주 들어가는 개수?

최소 4가지 종류의 식재료가 들어가고 최대 8가지도 들어갑니다. 그리고 매주 식재료의 종류가 다릅니다.


Q. 식재료가 과잉 생산되거나 부족할 경우에 대한 대처는 어떻게 하나요?

농장에 저장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과잉 생산된것은 저장시설에 보관하기도 하고, 상태가 좋지 않은 것들은 가축의 먹이로 주기도 합니다. 식재료가 부족하게 되면.. 조금밖에 못 나눠주는거죠. 우리의 원칙은 필요이상으로 생산하지 말자입니다.

하지만 매년 농장운영이 안정화 되는 이유는 생산과 소비에 대한 데이터가 계속 쌓이다보니 이런 조정이 잘 되고 있습니다.


Q. 야생동물이나 기후 문제는 어떻게 대응하나요?

피해 경험을 통해 대응법을 배워갑니다. 치킨 트랙터, 울타리, 토양 다양성 등은 그들의 해법이자 철학입니다.


Q. 일한 만큼 더 받을 수 있나요?

그런 보상은 없습니다. 대신 함께 책임지고 함께 나눕니다. 더 받기보단 더 깊이 참여할 수 있을 뿐입니다.


Q. 전문 농부는 어떻게 고용되나요? 임금 수준도 궁금합니다.

대부분은 농업교육을 이수한 졸업생이며, 전국 지원 조직에서 고용과 복지를 관리합니다. 주 40시간 근로기준을 충족해야하기 때문에 과업을 시키면 안되요. 월급은 저희가 사실 잘 모릅니다. 네덜란드의 시급 기준에 따르지 않을까요.


Q. 식재료의 쓰임에 대해 어떻게 조합원들에게 가이드 하고 있나요?

매주 뉴스레터를 조합원들에게 보내주고 있습니다.


Q. 도시에 살아도 참여할 수 있나요?
대부분의 조합원이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농장의 규모때문에 농촌 지역에 위치하고 있지만, 근처에 살고 있는 분들은 대부분 취미형으로 뒷마당을 가지고 있거나 작은 농사를 짓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조합원들을 모집하는것이 더 힘듭니다. 그래서 20km 이내의 도시 조합원이 많습니다.

지역 모임을 만들어 돌아가며 수확물을 나눠 갖고, 농장에 직접 오기도 합니다.


Q. 식재료에 민감한 경우는요?

알레르기나 식단 제한이 있다면 자유롭게 바꾸어 담을 수 있습니다. 강요 없는 나눔이 이 농장의 방식입니다.


Q. 야생동물이나 기후 문제는 어떻게 대응하나요?
피해 경험을 통해 대응법을 배워갑니다. 치킨 트랙터, 울타리, 토양 다양성 등은 그들의 해법이자 철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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