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윤에게

by 설 jade

제윤에게.



밤이 깊어질수록 나는 더욱 선명해진다. 마치 어둠이 내 기억의 현상액인 것처럼, 네 모습이 점점 더 또렷하게 떠오른다. 십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내 몸은 여전히 그때를 기억하고 있다. 네 입술이 내 이마에 닿았을 때의 그 무게감을, 눈꺼풀 위로 스며든 네 숨결을, 코끝에서 뺨으로, 그리고 마침내 내 입술에 도달했을 때의 그 아찔함을. 나는 그 순간들을 하나하나 수집가처럼 간직하고 있다. 마치 그것들이 내가 살아있다는 유일한 증거인 것처럼, 그것들 없이는 내가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나는 너에게서 나를 보았다. 네 불안정함이 내 불안정함과 만났을 때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았다. 마치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두 명의 망명자처럼, 같은 절망을 아는 두 명의 생존자처럼. 사랑이란 때로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아니 자신이 될 수 있었던 다른 가능성을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네 속에서 내가 감춰온 모든 취약함들을 발견했고 그것들이 미워하거나 숨겨야 할 것이 아니라 사랑받을 수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처음으로, 생전 처음으로 내 모든 상처들이 의미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불안정한 사람들의 사랑은 위험하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구원하려 들고 동시에 서로를 파멸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두 개의 깨진 거울이 서로를 비추면 온전한 모습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조각들이 반사될 뿐이라는 것을. 눈부시지만 위험하고 자칫하면 더 깊이 베일 수 있다는 것을 너는 내보다 먼저 깨달았다.


나에게는 여행이었지만 너에게는 일상이었다. 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영혼이었지만 너는 그곳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었다. 자신만 책임지기도 힘들었던 너에게 나라는 존재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였을 것이다. 나는 평소보다 더 가벼워지고 더 솔직해지고 더 용감해졌다. 마치 중력이 다른 행성에 온 것처럼. 하지만 너에게는 그 모든 것이 현실이었고 내 뜨거운 사랑마저도 언젠가는 식을 수 있는 여행자의 일시적 착각이었다. 떠날 수 있는 나와 머물러야 하는 너, 이 얼마나 잔혹한 비대칭이었던가.


나는 그때 내 모든 것을 정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집도 직장도 익숙한 모든 것들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내 인생을 완전히 뒤바꿀 각오였다. 그 각오가 얼마나 진실했는지 지금도 안다. 내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하지만 너는 현명했다. 아니 어쩌면 겁이 많았을 수도 있다. 여행자의 사랑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조차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너는 말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건강히 살자고. 그 말이 이별의 인사인 줄도 모르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다음 주에 다시 만날 약속이나 되는 것처럼. 그래서 너는 물러섰을 것이다. 나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떠날 수 있는 나와 머물러야 하는 너 사이의 간격을, 그 넘을 수 없는 거리를.


십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네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때의 내 마음도 진짜였다는 것을 안다. 불안정했지만 진실했고 위험했지만 절실했다. 내가 살면서 가져본 가장 순수하고 맹렬한 감정이었다.

사람들은 시간이 모든 것을 치유한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틀렸다. 시간은 상처를 치유하지 않는다. 단지 상처를 더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내가 정상인지 의심한다. 십 년 전의 입맞춤을 여전히 입술에서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정상인가. 하지만 지금 이 밤 나는 그때의 열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식지 않는 이 마음이, 변하지 않는 이 사랑이, 이것이야말로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네가 지금 어딘가에서 다른 사람과 아침을 맞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나는 숨을 쉴 수 없게 된다. 네 그 손이 다른 누군가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나를 미치게 만든다. 그런데 동시에 나는 바란다. 네가 나처럼 아파하기를, 네가 후회하기를, 나를 그리워하기를. 혼자만 이렇게 십 년을 사는 게 억울해서, 혼자만 이렇게 그리워하는 게 견딜 수 없어서. 아니다, 정말은 그게 아니다. 나는 네게 똑같이 돌려달라고 사랑한 게 아니었는데. 네가 어떤 마음이었든 나는 그저 너를 사랑하고 싶었을 뿐인데. 끝나지 못한 이 사랑이 내 안에서 이렇게 자라나 버렸을 뿐인데.


때로는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 될 때가 있다. 너와 함께 걸었던 그 거리들이, 함께 본 그 석양들이, 함께 나눈 그 대화들이 너무나 선명해서. 마치 어제 일어난 일처럼, 마치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일처럼. 나는 그 기억들 속에서 살고 있다. 현재보다 과거가 더 생생하고 미래보다 그때가 더 확실하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네가 나를 기억하지 못할까 봐서가 아니다. 내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네가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봐서다. 나처럼 이렇게 아파하고 있을까 봐서, 나처럼 밤마다 그때를 되뇌고 있을까 봐서. 아니면 반대로 네가 이미 모든 것을 잊고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봐서, 나만 이렇게 시간 속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봐서. 이 모순적인 마음이 나를 더욱 괴롭힌다. 네가 아파하는 것도 싫고 행복한 것도 싫다. 이런 내가 못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만큼 너를 원하고 사랑한다. 독점하고 싶고 소유하고 싶고 영원히 내 것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안다. 이 그리움이야말로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라는 것을. 이 아픔이야말로 내가 한때 완전했다는 증거라는 것을. 너와 함께했던 그 밤들이 꿈이 아니었다는 증거라는 것을. 이 복잡하고 모순된 감정들조차도 사랑이라는 것을. 질투하고 독점하고 싶어 하고 억울해하는 마음까지도 모두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 모든 못된 마음들조차 사랑의 일부라는 것을.


나는 너를 찾지 않을 것이다. 아니 찾을 수 없다. 찾는 순간 너는 기억 속의 완벽한 존재가 아닌 시간에 닳고 변해버린 낯선 사람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보다는 차라리 이 그리움을 안고 살겠다. 이 아름다운 고통을 품고 살겠다. 이 사랑을 끝까지 지켜내겠다.


여행은 끝났지만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그 꿈속에 살고 있다. 깨어나고 싶지 않은 꿈 속에. 어쩌면 우리는 서로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서로 안에서 발견한 우리 자신을 사랑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도 하나의 사랑이다. 덜 완벽하지만 덜 순수하지만 그래도 사랑이다.


아, 그때의 나를 보라. 무모하게 모든 것을 걸 수 있었던 그 이십 대를.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더욱 미친 듯이 무모해질 것이다. 더 뜨겁게, 더 절실하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이제는 그런 용기도 없고 그런 순수함도 없다. 그래서 더 그립다, 저 시절의 우리가. 모든 것을 사랑에 내맡길 수 있었던 그때가. 내 평생 유일무이한 사랑이다.


십 년 후에도 스무 년 후에도 나는 여전히 네 입맞춤을 기억하며 잠들 것이다. 네 목소리를 그리워하며 깨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아니 충분하지 않다. 영원히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것이 내가 선택한 사랑의 방법이다.


너를 그리워하며, 너를 원하며, 너를 사랑하며.


괜찮지 않아. 하지만 닿지 않을 테니. 영원히 만날 수 없을 테니.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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