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하게 살기, 심플 라이프, 버리기 연습.
생활 습관에도 유행이 있다면, 요즘 트렌드는 이런 것들인가 보다. 한참 전에는 아침형 인간이 유행이었고 얼마 전까지 인문학이 유행이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물건을 버리고 삶을 단순하게 살도록 독려하는 책이 자주 눈에 띈다. 여전히 마트에는 새로운 물건이 넘쳐나지만 말이다.
요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다양한 식재료를 구경하는 것도 좋아한다. 요리법을 읽다가 만들고 싶은 욕구가 불끈 들어 이런저런 재료를 구입하러 종종 나서곤 한다. 늘 굳은 다짐(꼭 두부만 사 오는 거야, 두부만 사야지!) 하고 나서나 신제품에 (그것이 맥주라면 더더욱) 마음이 약해져 한 두 개쯤 새로운 것을 담아오곤 한다. 이번 주 언젠가 해 먹으면 되지,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된장찌개를 끓이려 냉장고 문을 열면 꼭 그렇게 예상에 없이 사 온 재료가 눈에 들어온다. 마치 나를 언제 꺼내 줄 거냐고 텔레파시를 보내고 있었다는 듯. 아아, 기다려. 그런데 오늘은 아니야. 하루 이틀 지나고 점점 시들어가는 식재료를 미안한 마음으로 바라보다가 어찌어찌 활용하게 되면 뭔가 대단한 프로젝트를 완수했다는 성취감과 뿌듯함을 느낀다. 허나 그렇지 못했을 경우. 그러니까 그 재료가 고스란히 시들다 못해 구제불능이 되어 음식물 쓰레기 통으로 들어가야 했던 날은 재차 (부질없는) 다짐을 하곤 한다. 진짜로, 절대로 다음번에는 '두부만 사야지!’라고.
신제품 좋아하는 사람이니 만큼 트렌드 또한 따라가게 되는 갈대 같은 사람이니 요즘 불어오는 '심플 라이프' 바람에 동참하고 싶어 졌다. 물건을 버리는 건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라 그건 천천히 실천해 보기로 하고, 그 전에 예행연습으로 한다는 냉파족(냉장고 파먹기) 대열에 합류하기로 말이다. 포스트잇 두 장에 한쪽은 냉장실, 한쪽은 냉동실에 있는 품목을 적어내려 갔다. 냉장고 안이 단순할 때는 머릿속도 단순해진다. 예를 들어 달걀과 대파, 양파와 당근 정도라면 기름에 대파를 달달 볶아 파 기름을 만들고, 거기에 밥을 볶고 계란 볶음을 더해 중국식 계란볶음밥 정도로 저녁 메뉴를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가짓수가 더 많아지면, 즉 재료가 많아 선택지가 다양할수록 머릿속은 여러 가지 경우의 수로 넘치게 된다. 된장찌개를 끓일까? 카레? 아냐, 감자 샐러드? 아아 저기 저 뒤에 비닐 팩에 들어있는 건 뭐였더라. 이런 경우 선택부터 지치게 되므로 음식을 만들 에너지가 현저히 떨어지게 된다. 이래서들 심플 라이프, 심플 라이프 하는구나 싶다.
언제나 결정은 어렵다. 5지 선다형 문제에서 답이 아닌 세 가지를 지우고 남은 두 개의 경우 중 고르고 골라 쓰면 주로 그게 틀린 답이었다. 아, 2번 말고 5번 고를 걸, 하는 후회! 저 길로 가면 더 낫지 않았을까? 인생의 갈림길에서 선택하지 않았던(혹은 못했던) 다른 길은 마음에 남는다. 단순하면 '갈등'이 없을 줄 알았는데, 모 아니면 도 , Plan A or B 에는 '아쉬움'이 있다. 그래도 선택 단계에서 미리 기운을 빼는 ‘복잡한 갈등'보다는 하나의 '단순한 후회'가 나을지 모른다. 어느 것에도 갈등과 후회는 모두 존재하지만,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를 집중하는 데에는 몇 안 되는 선택지가 낫다. 다양한 재료로 꽉 채운 냉장고에서 차일피일 순서가 밀려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기 직전에야 겨우 저녁거리로 승화된 팽이버섯을 떠올리면 말이다. 단순할수록 우선순위가 매직 아이처럼 또렷하게 보인다. 열두 켤레의 신발을 갖고 있지 않아도 일곱 색깔 티셔츠가 옷장에 없어도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