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틈을 줄여보자는 다짐

by 산책

11월이 되면 요이땅 하듯 시작하는 것들이 있다. 온라인 서점, 프랜차이즈 아이스크림 가게, 카페, 도넛 집 등등 에서 새해 달력과 다이어리를 쏟아 내는 일. 일정 금액 이상 구매 고객에게 주는 이 사은품을 둘러보며 어느 날은 예상에 없던 지출을 하기 도 한다. 어머, 이 달력은 꼭 갖고 싶어! 어떤 것들은 해가 바뀌어도 선뜻 버릴 수가 없다. 꽤 근사하고 멋진 사진들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작년인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이란 책에서 고른 사진으로 만든 달력은 여전히 책장 위에 올려 져 있다. 이미 지난 열두 달이니 월을 맞춰 내 걸 필요가 없어 그때그때 가보고 싶고 마음에 드는 곳 한 군데를 골라 펼쳐 두었다. 지금은 '세계 여행을 떠나라고 유혹하는 서점' 영국의 '돈트 서점'이다.

11월. 새해의 시작을 준비시키는 달, 달력과 다이어리를 손에 들고 다가올 시간을 그려보라 하는 달. 지금과 다음이 어슷하게 교차하며 공존하는 달. 나란한 1의 숫자가 가는 가을과 오는 겨울의 두 계절처럼 서 있는 그런 달이다. 11월에 시작되는 이벤트는 상술이라고 해도 (어느 달에는 상술 아닌 게 있던가! 알면서도 속는 척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면서 왜 장바구니를 비우는 얼굴은 그런데 왜 웃고 있는지) 슬며시 발을 담그게 되어 있다. 그런 달이기 때문이다. 문구 코너 에서 다이어리를 고르게 하는 달, 내년 언젠가의 여행을 꿈꾸게 하는 달.

그리고 본격적으로 그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달 12월이 시작됐다. 1과 2. 이제 완전히 등 돌린 가을과 쭈뼛쭈뼛 가을의 영역에 한 발씩 비비고 들어왔다가 온전히 자기 자리를 차지한 겨울이 서 있다. 가을 안녕, 겨울 안녕?

책상 위에는 책 구매 후 받은 2016년 달력이 놓여 있고 어느새 (변명의 여지없이 도장 채우고) 받은 새 다이어리가 있다. '작년에도 제대로 안 썼으면서 올해 또 나는 왜'라는 후회는 늦었다.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 이미 일어난 일이니까.

책장 한 구석에 이제는 다이어리로써의 임무를 다 한 (그러나 노트로는 손색없는 여백, 여백, 여백) 지난 시간들이 꽂혀 있다. 다 채웠다면 더더욱 못 버렸을 테지만, 채우지 못한 곳이 더 많아 차라리 메모지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모아 둔 다이어리들을 보면서, 문득 나의 지난 시간도 그렇게 흘러온 게 아닌가했다. 듬성듬성 사이에 둔 공백은 게으름과 핑계와 미뤄두고 외면한 것들, 후회로 채워져 있지 않은가 했다. 매년 하는 다짐이 같고(보다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다짐들,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지금을 벗어나고 싶어 쓰는 외침들. 예를 들면 5kg 감량, 책 100권 읽기, 영어 공부, 10km 달리기 등등. 그런데 이런 거 하면 보다 나은 사람이 되는 건 맞나, 의심의 싹은 늘 품고 있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모두 이뤄 보지 못한 다짐이기 때문에) 매년 하는 후회가(올해도 이렇게 갔네) 비슷하니 말이다. 그러다 다시 깨닫는다.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 앞에서의 후회는 어디에도 쓸 데 없는 일이라는 것을.

이왕 이렇게 됐다. 후회와 반성이 난무하여 어지러운 마음이어도 12월이 왔고 새해가 밝아올 것이며 새 다이어리와 새 달력은 이미 펼쳐졌다. 지난 공백도 ‘나’이고 지금 세상의 쭈구리도 ‘나’다. 그러니 시간의 결을 좀 더 촘촘히 다져보자는 올해의 결심이 결심으로 그쳤어도, 그리고 그것이 도돌이표처럼 돌아 새해의 결심이 된다 해도 적어 본다. 다짐해 본다. 시간의 결을 딱 손톱만큼만 더 촘촘히 다져보자고. 책을 딱 한 페이지만 더 읽어 보자고. 다이어리에 딱 한 줄만 더 써보자고. 삶의 빈 페이지를 그렇게 조금만 더 줄여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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