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산책

새를 무서워한다.

아주 어릴 적, 흑백 영화로 히치콕의 <새>를 본 적 있다. 그게 어떤 영화였는지는 훗날 고등학생이 되어서 알았지만, 그때 본 인상 깊었던 장면(그리고 끔찍했던 장면) 하나에 새를 무서워했다. 어떤 섬에서 새의 무리에 쫓기던 여자가 결국 새 떼에게 공격을 당한다. 여자의 동공을 쪼던 새들.

이후로 새의 부리가 싫었다. 학교 앞에서 병아리를 팔던 할머니 앞에 친구들이 모여 있을 때에도 일부러 멀리 돌아갔다. 작고 빨간 부리, 오돌토돌한 발이 싫었다.

까치의 날카로운 부리도 무서워했다. 까마귀는 흉조라고 해서 싫었다. 비둘기는 너무 많아 무서웠고, 갈매기 똥에 맞은 뒤로는 갈매기도 싫었다. 그렇다고 모든 새를 싫어한 것은 아니다. 동물원에 들어가면 맨 처음 마주하는 분홍색의 플라밍고 무리는 아름답다. 가까이 다가오면 도망가고 싶지만 (부리로 쪼이는 상상은 나이를 먹어도 공포다) 공작새의 화려한 자태도 좋아한다. 지빠귀의 지저귐도 좋아하고, 나무를 콕콕 쪼는 딱따구리는 귀엽다.

얼마 전에, 깃털에 대해 알아보다 알게 된 과달루페 바다제비를 종이로 재현한 작품을 보게 되었다. 윤이 반질반질 나는 작은 머리와 긴 꼬리, 날렵하게 뻗은 날개가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구전되는 새의 울음소리였다. 여기 편지가 있어, 여기 편지가 있어. 편지를 전해주는 새. 과달루페라는 섬에 살았다는 바다제비가 까만 주둥이에 돌돌 말은 하얀 편지를 물고 바다를 건너가는 상상을 했다. 섬에 사는 아이가 뭍에 사는 친구에게, 그렇게 건너가는 편지. 지난여름은 정말 재미있었어. 다이빙하던 바위, 요새를 만들었던 해변. 올해에는 내가 새로 발견한 숲에 가보자. 숲에 정말 맛있는 산딸기가 있어. 네가 오는 그 날만 기다려. 같은 내용이 담긴 편지.

새는 이제 사라졌고, 섬에는 누가 사는지 모른다. 그렇게 사라진 새들이 정말 많을 텐데. 같이 살다가 어딘가로 사라진 새들.

언젠가 길거리의 비둘기를 미워하지 말란 동물학자의 글을 읽은 적 있다. 그들도 인간과 사는 것이 얼마나 피곤하겠냐는 내용이었다. 누군가의 토사물, 먹다 남긴 라면 같은 그런 것들을 먹고사는 비둘기, 차에 치이고 고양이에 습격당하고 다리 하나를 잃으면서도 남아 있는 새들. 과달루페 바다제비가 낭만적인 것은 사라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더 볼 수 없는 새라서 사람들은 그들에게 그런 색을 입힌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남아 있는 것들, 포악하다는 까치, 불경하다는 까마귀, 더럽다는 비둘기 같이 주변에 흔한 새들에게 인색한 수식어를 붙인 것은 결국 인간의 시선이니까. 작은 소리로 존재를 알리는 여러 종류의 새소리를 들으며 이 글을 쓴다. 어디에 앉아 있는지 보이지 않을 높이에서 존재를 알리는 소리. 보는 것보다 보지 못하는 것이 더 많다. 아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더 많고.

어떤 전시에서 이제 멸종된 새들의 소리, 민족의 언어가 끝없이 나오는 작품을 봤다. 세계 지도가 펼쳐진 벽면 위에 소멸되고 있는 언어와 새와 동물들의 이름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 졌다. 글자들은 지도를 가득 채우고 사라지고 채우고 사라졌다. 보는 것보다 보지 못하는 것이 더 많다. 아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 역시 더 많다. 더 많은 것을 보고 알아야 하나, 같은 생각이 들지만, 본 것을 또 보고 안 것을 되새기는 것이 먼저이지 않을까 싶다. 익숙한 동네 새의 무리 중 한 무리가 사라졌다. 저층 아파트 지붕 위에 열을 지어 앉아 있던 까마귀 떼가 요즘은 보이지 않는다. 아파트들이 많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들 역시 과달루페 바다제비처럼 종적을 감춘 것일 텐데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본 것을 또 보지 못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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