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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Jan 05. 2019

겨울

겨울이 왔다. 무릎이 시려온다. 엄지발가락과 콧등이 시리다. 따뜻한 울 양말을 꺼내 신고, 기모가 잔뜩 든 바지를 입어도 몸 안으로 들어오는 한기를 어쩌지 못하는 계절. 손끝이 얼얼해지고 귀까지 잔뜩 두른 머플러 때문에 안경에 김이 서려 걷는 게 쉽지 않지만, 그래도 겨울을 좋아한다. 빛과 그림자. 겨울의 한기는 온기를 배가시킨다. 그래서 볕이 들어오는 공원 가운데 서서 맞는 겨울 햇살은 어느 계절보다 따뜻하다. 

겨울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크리스마스였다. 12월이 시작될 무렵, 시내 한복판에 별 모양, 눈송이 모양으로 반짝거리는 크리스마스 장식을 보는 밤을 좋아했다. 기대했던 선물을 받게 될까 12월 내내 설렜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남아 있다. 산타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도 크리스마스는 무언가를 약속한 날처럼, 기다렸다. 세상이 옷을 바꿔 입 듯 달라지지 않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 전후의 공기는 달랐다. 찬 공기 안을 떠돌던 설렘과 밝음이 12월 25일 아침이 되면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그리고 겨울바람 속에는 한 해의 마무리와 새해의 시작을 기다리는 알 수 없는 경건과 차분함이 담겨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이 옷을 바꿔 입는 것이 맞겠다. 

겨울이 왔다. 

겨울에는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열일곱 겨울, 남색 떡볶이 단추 코트를 입고 친구와 대학로에서 영화를 봤다. 레오 까락스가 나온 프랑스 영화였는데, 재미가 없어서 중간에 나왔다. 그리고 마로니에 공원에서 사진을 찍었다. 친구는 사진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날의 나를 흑백 사진으로 남겨주었다. 겨울과 대학로에는 그 기억이 남았다. 그리고 또 겨울, 성탄 전야 미사를 마치고 함박눈이 내리던 공원을 걸었던 밤이 있다. 겨울에 결혼했고, 겨울에 두 아이를 낳았다. 겨울에 상주의 자리를 지켰고, 겨울에 태어났다. 

모든 것이 땅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계절에 땅 위의 나는 끝없이 살아남았다. 겨울을 좋아하는 것은 이 계절이 분명하게 나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언 땅 위에 너는 서 있다. 뜨거운 온기를 지니고 이 땅 위에,라고.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면서,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새해 다이어리를 펼치면서, 새 해의 날들에 파랗고 노란색으로 동그라미를 치면서, 겨울은 나에게 쉬고 있는 숨을 보여준다. 하얗고 깊은숨이 공기 중으로 퍼진다. 살고 있다. 숨 쉬고 있다. 걷고 있다. 서 있다. 

겨울은 나를 낳았고, 말을 걸고, 숨을 넣는다. 겨울 볕이 토닥인다. 어깨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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